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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Oct 18. 2021

때때로 여성은 여성을 좋아합니다

아니, 사랑합니다




그녀가 저에 대한 작가로서의 의무를 이행하겠다면, 저는 그녀에 대한 독자로서의 의무를 이행하겠다고 결심하면서, 페이지를 넘기며 읽고 있는데....... 너무 급작스레 중단해 미안합니다. 현재 남자는 아무도 없는 거지요? 저기 붉은 커튼 뒤에 차트리스 바이런 경이 숨어 있지 않다고 제게 장담할 수 있지요? 우리 모두 여자들뿐이란 게 확실한 거지요? 그럼 제가 읽은 바로 다음 말들이 이거였다는 걸 여러분한테 말해도 되겠지요. "클로에는 올리비아를 좋아했다"... 펄쩍 뛰지 마세요. 얼굴 붉히지 마세요. 우리 사회 은밀한 것에선 가끔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걸 인정합시다. 때때로 여성은 여성을 좋아합니다.


*차트리스 바이런 : 영국의 변호사, 치안판사. 여성 작가의 여성 동성애 묘사가 있는 소설을 '외설'로 단정하고 모두 회수해 폐기하도록 지시했다.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중



*


싱가포르에 갔다 오고 한 달 반 정도 만났던 애인이 있다. 그 애는 남자였고, 무릎까지 오는 교복 치마를 입을 때 만났던 동창이었다. 그리고 나를 좋아했다. 나는 그 애를 그렇게까지 좋아했던 것 같지는 않다. 좋아할 준비를 했을 뿐.


싱가포르에서 나는 도저히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고는 못 배길 사람을 만났다. 그녀는 나보다 나이가 많고, 지금까지는 성소수자가 아니었고(지금도 아닐지도 모른다), 나에게 키스를 하지만 남자 애인이 있다. 언니를 생각하면 핑크색 구름 사이에서도 마음 한구석이 쓸쓸해진다. 언니를 사랑하면서 세상에서 제일 마음 아픈 청첩장을 받게 될까 봐 가슴을 졸인다. 가야지. 그래도 가야지. 언니도 언니의 신랑도 나한테는 너무 소중한 사람이니까.

그것과 상관없이 언니가 고개 숙여 다가오면 입을 벌린다. 언니의 입맞춤은 양심이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릴 만큼 달콤하다. 나는 내 주변의 모두에게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말하고 다녔다. 사랑은 나 혼자 품고 있기에는 너무 들뜨고 황홀한 것이라 참을 수 없었다. 언니는 아무에게도 내 얘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이에 샘을 내는 건 언니의 애인, 레오뿐이다. 그는 알고 있다. 왜냐하면 레오보다 먼저 언니를 사랑한게 나였으니까. 나는 여자이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언니에게 다가가기가 힘들고 염려되고 걱정스러웠고 레오는 남자이기 때문에 성큼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할 수 있었던거 아닐까? 그저 추측일 뿐인데도 배가 아프다. 레오도 언니를 만나는 데에 골치가 아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비겁한 질투가 든다.


내가 먼저 사랑했는데.


전 애인과 교제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말했다.


"싱가포르에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은 여자고, 나는 아직 언니를 많이 생각해."


그 애는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서로 연락은 더 이상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일주일 만에 알아챘다. 언니에게 마음이 묶여버린 이상 나는 어떤 인연도 시작할 수 없다는 것을. 연락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놓고 언니에게 새벽에 사랑한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녀는 늘 같은 답장을 한다.


’나도.‘


나는 내가 사회의 시선에서 적당히 윤리적이고 타당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언니를 만나기 전까지만.

남자 친구가 있는 여자와 키스를 한건 처음이다.(애인이 있는 누구와도 감정을 교류 한 적 없다)(심지어 키스를 한 번만 한 것도, 술김에 한 것도, 후회한 것도 아니다) 교제를 시작한 사람에게 떳떳하지 않은 적도 처음이다.(나는 정말 언니와 연락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그럼 네가 언니보다 사랑스러워지던가) 언니를 사랑하는 게 나를 부도덕한 사람으로 만드는 걸까. 하지만 나는 언니를 포기할 수 없다. 언니가 레오와 결혼하기 전까지 나는 열심히 레오의 연적이 되어줄 것이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녀의 웃음에 마음을 갖다 바칠 것이다. 그녀가 키스하면 눈을 감을 것이다.


레오 너는 편법을 썼어. 비겁하긴. 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으면서.


시간 순서와 형식을 갖춰 제대로 쓰게 되면 언니와 내 사이가 지금보다 또렷해질까. 막상 머릿속에 있는 걸 꺼내놓으려고 앉아있으면 눈앞이 막막하고 까마득하다. 애인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그 외도를 사랑으로 합리화하는 것도 고난스럽다. 언니는 무슨 생각일까. 왜, 왜 나한테 키스했을까. 키스만 하지 않았어도 보석 같은 짝사랑으로 간직했을 텐데 왜 욕망하게 했을까. 왜 아직도 나에게 햇살 같고 바람 같을까. 언니가 나에게 느끼는 것은 호기심일까 귀여움일까 안쓰러움일까.

우리는 이틀 뒤에 만난다. 언니의 앞에서 하는 생각은 늘 똑같다. 아무것도 묻지 않기. 기대하지 않기. 사랑하기. 계속, 계속 사랑하기.

언젠가 언니가 나에게 했던 말이 잔잔하게 뇌 속에 고여 흐른다.


레오가 너를 많이 질투해.

아, 정말 지옥에 떨어질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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