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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Oct 19. 2021

이렇게 살고 있다

삼겹살을 먹고 명언을 읊으며.





​​​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본문 중

*


하루를 전부 쏟아 스티븐 킹의 <돌로레스 클레이본>을 완독 했다. <그린 마일>과 <캐리> 만큼이나 강렬하게 읽었다. 여자는 자식의 미래를 위하거나 막대한 유산이 갖고 싶어서 남자를 죽일 것 같지만 사실은, 그냥 사실은 남자 주제에 여자를 무시해서 살의를 품는다.

다시는 나한테 그딴 식으로 대하지 마.

지금껏 경찰이 모르는 데에서 남편을 죽인 수많은 여자들을 생각했다. 남편을 죽인 여자들끼리의 우정에 대해서도. 살인으로 엮인 인연은 여성들이 입이 걸걸한 노인이 될 때까지 이어진다. 사랑의 똥내를 폴폴 풍기며.


완독하고 곧장 영화 <돌로레스 클레이본>을 보았다. 영화 <미저리>에 주연배우 캐시 배이츠가 출연한다는 이야기에 솔깃했다. 스티븐 킹 전문 배우.

영화로 만들어내기에 최선의 각색을 감행한 것이 돋보였다. 원작을 안 읽고 영화만 본 동생은 골초에 신경쇠약인 셀리나 캐릭터를 좋아했다. 저렇게 예민한 여자들은 영화에 자주 나오지 않는다면서. 어른이 된 셀리나는 원작에서 비중이 높지 않았던 터라 나 혼자 낯을 가렸다.

스티븐 킹은 영화로 만들고 싶어지는 소설을 쓴다. 남편을 죽이는 여자들을 꽤 그럴듯하게 쓴다. 영화를 보면서 동생과 나는 각각 와인 한 병을 비웠다. 얼큰하게 취기가 올라온다.


이혼과 남편 살해, 모든 여자들의 꿈 아니야?

우리는 위험한 말을 하면서 낄낄댄다. 여자들은 남편이 사라지면 할 말이 많아진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할머니의 인생을 글로 쓰고있는 동생은 할아버지라는 사람이 가진 선함과 인덕을 내게 전한다. 나는 목을 어깨로 쏙 집어넣으며 몸서리를 친다.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천사라고 불렀다고? 나는 동생에게 얼른 장르를 로맨스로 바꿔버리라고 하지만 동생은 6.25 전쟁 때 태안(친가 고향)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에 머리가 복잡하다. 씨족 분쟁이 시발점이 되어 대규모의 고발과 민간인 총살이 벌어졌던 현장에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어린 아빠가 있었다. 할머니를 은애하여 천사라 부르면 조부모의 로맨스는 금세 어디로 숨어버린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사랑한다.

할아버지도 할머니를 아주 많이 사랑했다.

그런 할머니 할아버지가 갓난쟁이인 나를 키웠다.

나는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사랑한다. 할머니에게 남편을 죽이는 것이 여자의 꿈이라고 말하면 호된 꾸지람을 들을 것이다.


동생과 나는 밤을 꼴딱 새우고 아침 아홉 시까지 수다를 떨었다. 할아버지의 온화함과 엄마와 아빠와 나와 동생과 피를 아울러 자꾸만 명분을 찾게 되는 험난한 가족사에 대한 수다를. 할머니는 글씨를 몰랐다. 동생은 슬퍼했다. 일곱 딸 중에 셋째였던 할머니가 유달리 야무지고 똘똘해 학교 문턱도 넘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을, 여든 평생 어깨너머로 자음과 모음을 익혔다는 것을, 그리고 할머니가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지금서야 알았던 것을. 나는 화가 난다. 가부장적인 역사에서 교묘하게 계획된 훈육의 희생자가 바로 지척에 있었다니. 할아버지는 육십이 되어 글이 배우고 싶다는 할머니의 한마디에 곧장 노트와 노란 연필 한 상자를 사다 주었다. 동생이 할머니에게 글을 알려주겠다며 연필깎이를 사왔다가 알게 된 일이다.

공부가 하고 싶다 했더니 할아버지가 사주었지. 내 여적 써보지도 못했네..​


할머니는 연필을 새 것인채로 가지고 있고 싶어 했다. 우리는 시범 삼아 두 자루를 깎아드리고 네 자루는 손에 쥐어드렸다. 할머니가 할아버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꼴깍 죽었다가 오후 한 시에 일어났다. 해장 거리를 찾다가 오랜만에 외식을 하기로 했다. 역 근처에 있는 고깃집은 동생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삽겹 2인분과 껍데기 1인분, 명란 안주, 솥 비빔밥에 사이다 세병을 먹고 왔다. 짧은 입 두 개가 감당하기엔 버거운 식사였지만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기분이다.

나는 중간에 그만두는 것을 못한다. 음식을 먹다가 남기는 것, 영화나 책을 중간에 내려놓는 것, 일을 하다 계약 기간 전에 그만두는 것. 동생은 내가 피곤한 성격이라고 말했다. 이미 많이 먹었으니 명란만은 그냥 남기고 집에 가자고.

아니, 그럴 순 없어.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어디서 들어본 말인가 했더니 작년 여름 <노인과 바다>를 재독 하면서 적어둔 명대사였다. 우리는 같이 그 문장을 읊었다. 내가 남은 고기들을 입에 집어넣고 있을 때 동생은 이미 배가 불러 뻗어있었다. 나는 남기지 않았다. 인간은 패배할 수 없다. 아예 그렇게 창조되지 않은 생물이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걸음을 빨리하며 기분 좋게 부른 배로 귀가했다. 기분이 상쾌하다.

집에 와서 팀 오브라이언의 <그들이 가지고 다니던 것들>을 읽는 도중에 기분이 묘해 영화 <1917>을 다시 보았다. 두 번 봐도 수작이다. 같이 본 동생도 만족스러워했다. 영화를 관람하고 나서 책도 완독 했다. 지금은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날이 다 밝은 채로 어제오늘의 일과를 정리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 마음이 혼곤하다. 세계 대전과 베트남 전쟁의 이야기, 우물에 떨어진 남편의 이야기, 건너편 여자아이의 비린내를 맡는 이야기들 사이에도 로맨스는 굳건하게 살아남아 수요일에 만나는 언니에 대한 생각을 한다. 그러다가 전쟁터로 돌아온다. 나무에 널린 내장과 남자가 죽인 청년의 시체 이야기로. 어지럽다.

어제의 숙취로 오늘은 맥주 한 캔밖에 먹지 않았다. 글 쓰는 것을 시작하기 힘들다. 모든 걸 쓰고 싶기도 하고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요즘 보고 있는 영화와 책이 빠짐없이 좋다. 내일은 뭘 보면서 출근할까. 똥물에 빠져 죽은 카이오와를 생각하며 코맥 맥카시의 <핏빛 자오선>을 읽어볼까, 제주도 4.3 사건을 배경으로 한 <순이 삼촌>을 읽어볼까. 동생이 추천해준 <그녀들의 방>도 괜찮은 선택일 것이다.​


삼겹살 삼인분을 먹고 전기장판 위에서 낮잠을 푸지게 잤더니 잠이 오지 않는다. 이번 주에 목표했던 독서목록을 무사히 끝마친 것에 안도한다. 늘 아슬아슬하고 무의미하게 살고 있다. 이런 것들도 내가 써놓는 바람에 어딘가에 남는 기록이 된 것을 생각하면 하찮고 우스운 일이다.

나는 패배하지 않았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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