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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Nov 10. 2021

신나는 독후감을 썼다!

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 단상


글을 쓰기.




사실 세상 모든 글은 독후감이다.


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 에필로그 중


*


<정희진처럼 읽기>를 완독하고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를 읽는 중이었다. 책에 머리를 하도 얻어맞아 골이 띵할 지경이다. 나의 안온한 퀴어 인생에 대해 써보려고 노트북 앞에 앉았는데 아침에 다 읽은 책에서 접어 놓은 부분을 옮겨 적다가 마주친 문장이다. 사실 세상 모든 글은 독후감이라는, 정희진 작가의 한 줄.


내가 '기록되어있던 문장 속에서' 매거진에 올릴 글을 쓰는 과정은 우스꽝스럽다. 화가 나거나, 속상하거나, 한풀이하고 싶은 주제를 하나 정해놓고 노트 속에 남겨둔 기록을 뒤져 그럴싸한 문장을 갖다 붙인다. 결국 내 얘기만 할 구실로 글 앞에 몇 마디 달아놓는 행태를 ‘감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글을 쓰지 않는다. 글을 쓰기 위해 주섬주섬 잊었던 문장을 가져다 기워붙인다. 그렇게 3년 전에 5년 전에 읽었던 책의 문장도 다시 마주친다. 반갑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좋은 문장을 영 못난 곳에 이용한 느낌도 든다. 그렇게 혼자 고민하다가 읽은 문장이다.


사실 세상 모든 글은 독후감이다, 라는.


<정희진처럼 읽기>는 남에 글의 감상을 적어내는 것을 불편해하는 나 같은 사람도 서평을 쓰고 싶게 만든다. 지금껏 읽은 책 전부까지는 아니더라도 최근에 읽은 몇 권 정도는 힘줘서 진득하게 서평을 써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이 공들여 쓴 저서를 평가하는 것도, 그에 대해 (지나치게) 솔직하게 개인의 생각을 내어 보이는 것도 어딘가 꺼려져서 은근슬쩍 피해왔엇다. 사실 그 이유는 누군가 내 글을 읽을 때도 내가 하는 것처럼 어물쩡 좋은 점만 말해주기를 바랐던 스스로의 유치함이다. 나보다 많이 알고 나보다 똑똑한 전문가들이 내가 섣불리 쓴 부족한 글을 읽고 혀를 찰까 무서운 것도 있다.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 혹시라도 오류 있는 내용을 써놓을까봐, 구성이 숭숭 난 글을 이름표처럼 붙이고 다니는 꼴이 될까 봐. 본문에서는 이런 고민에 대한 속 시원한 답변도 내어놓는다.

‘남에 글을 내용이 아니라 ‘비전공’ 논리로 비판하는 것은 자기 허락을 받으라는 얘기인가? 이른바 통섭의 시대에 공부의 ‘유목민’에게 비전공자 운운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는 사람이 지식인인가? 그런 판관 노릇을 하고 싶으면, 이 정권에서 장관을 하시는 게 맞다.’

정보의 사실여부에 대한 지적은 수정하면 될 일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인가?

수많은 책이 나를 통과해 지나갔고, 내 머릿속에는 뒤죽박죽 쌓인 정리 안된 도서관이 있다. 내가 하는 생각과 감상, 사고의 모든 것은 내가 읽은 책들에 대한 모종의 감상이라고 믿는다. 그게 나이고 내 인생이다. 그 책이 없이는 이런 인간이 되지 않았겠지. 사실, 세상에 모든 글은 독후감이 맞는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며 다음번 도서관에서 빌려올 책들이 무더기로 생겼다. 정희진 작가의 서평은 화두가 되는 책 한 권뿐이 아니라 여러 운동가와 작가의 다른 예술 및 저서와 버무려져 호기심이 안 들래야 안들 수 없다. 그녀가 쓴 글에서 언급된 모든 것이 흥미롭다. 건너 보는 사람도 읽고 싶게 만드는 서평이다. 지금까지 내가 썼던 몇 안 되는 독서 감상문을 다시 찾아봐야겠다. 내 얘기를 쏙 빼놓고 책 한 권에 대해 집요하게 쓸 만큼의 분량이 나왔다는 것은 그 책이 나에게 퍽이나 인상이 깊었다는 뜻이다.(그만큼 나는 내 얘기를 주절거리지 않고는 완성이 되지 않는다) 최근에 뭐가 있었나 생각해보니 코맥 맥카시의 <핏빛 자오선>, 옥타비아 버틀러의 <와일드 시드>, <킨>, 그리고 욘 린드크비스트의 <경계선>이 있다. 수나우라 테일러 <짐을 끄는 짐승들>도 아슬아슬하게 감상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경우는 다른 얘기로 샐 정신도 없이 끊임없이 책의 내용에 대한 생각을 했다. 나는 많은 책들을 두고 그에 대한 얘기를 썼구나. 정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라는 인간이 지금까지 읽어왔던 책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좋아했던 책, 두 번 세 번을 읽었던 책, 영향받은 작가, 사랑하는 작가, 그리고 신음이 새어 나올 만큼 싫어하는 글의 스타일이나 작법까지도. 정희진 작가의 문장으로 새삼 안심이 된다. 핑계나 구실처럼 미운 말을 붙이지 않아도, 분명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그 사이에서 뽑아낸 문장을 가져다 말머리에 가져다 놓는 것은 내 나름대로의 글쓰기 방법이다. 지금 읽고 있는 책도 생각이 꼬리를 물게 하는 좋은 책이다. 내가 사랑한 책을 타인들도 호기심에 기웃거리게 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이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글. 정희진 작가의 글처럼.


정희진처럼, 이라는 말이 꽤나 칭찬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처럼 읽고, 그녀처럼 서평 쓰기. 지금 읽는 책이 끝나면 정희진 작가의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어야겠다. 나에게 놀라운 사실을 알려준 작가다.


사실 세상 모든 글들은 독후감이라고.


그녀의 가치 있는 독후감이 나를 통과해

또 어딘가에서 나에게 독후감을 쓰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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