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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Oct 05. 2021

글을 쓴다

계속 쓴다



굿모닝, 화창한 날이다! 그런데 당신은 엉망이다.


아담 로저스. <프루프 술의 과학> 제8장 숙취 중


*


굿 모닝!

11일 연근 일정에서 7일째 날이다. 이제 나흘만 더 일하면 쉴 수 있다. 머릿속은 여전히 진흙탕이고, 기분은 구정물 색깔인 데다가 컨디션도 좋지 않다.

어젯밤 이주만에 처음으로 술을 끼지 않고 잠들었다.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할 만큼 늦잠을 자고, 개운하게 일어나서 다시 구정물 속으로 들어간다. 들어간다.


이 경쾌하고 귀여운 문장은 열정적으로 숙취 해소법을 찾아다니는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당연하지만 첫 문장 속의 '당신'이 엉망이 된 이유는 지난밤 진탕 마신 술 때문이다. 어제도 나는 숙취로 인한 두통으로 근무 내내 짜증스러웠다.(숙취로 인한 두통인지, 스트레스로 인한 두통인지는 알 수 없다) 아쉽지만 오늘 내 몸의 느적지근함은 분명히 술 때문이 아니고 지금 내 주변에 진물처럼 베어 나오는 불운에 있다. 늘 그렇듯 어떻게든 떨쳐내고 도망가보려는데 시간이 걸린다. 나이를 먹었다는 뜻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책을 읽고 있다. <자기만의 방>을 다 읽고 <3기니>를 막 펼쳤다. 새끼줄처럼 비비 꼬면서 다른 성들의 속알머리를 살살 긁는 문장들을 보니 구린내 났던 기분이 좀 나아진다. 더 책을 읽고 싶고, 영화를 보고 싶다.


지난주는 정신 상태가 바닥을 뚫고 바닥보다 더 바닥인 곳에 내려갔을 때 글을 썼다. 동생은 내가 그럴 때 쓰는 글은 과하게 방어적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심적으로 여유가 없을 때마다 글이 단단해진다고. 휘어지지 않는 단단함이 아니라, 파고들 구석이 없는 단단함. 마치 콘크리트 같은 꼴이라고 했다. 이미 꽉꽉 막혀서 다른 것이 들어오고 나갈 틈이 없는, 바다에 던지면 해구까지 가라앉을 돌덩어리. 동생은 독자를 상정하고 글을 써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말한다. 혼자 하는 말은, 혼자만의 이야기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고 호기심도 생기지 않는다고.

나는 그런 글을 쓸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나는 한국어를 읽을 줄 아는 전 세계의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한 문장을 끄적이는데도 벌벌 떨게 될 것이다. 나는 아무도 상정하지 않기에 자유롭다. 내 글은 어떨 땐 더러워지고 어떨 땐 경솔하다. 내가 그런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이 쓰는 글이라서.


버지니아 울프는 기록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문장에 위안을 얻는다. 이 모든 흐릿한 삶들이, 경솔하고 부족한 한 인간의 삶이라도 할 수만 있다면 기록되어야 한다고. 나는 여성이고, 능력 없는 서비스직이고, 충분히 현명하지 못한 채로 세상을 살아가느라 이런 이야기밖에 쓰지 못한다. 출근 전에 메모장을 두드려 겨우 이십 분 이 글을 썼는데도 전보다 기분이 나아졌다. 어쩌면 글을 쓸 수 있어서 그나마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 모든 흐릿한 삶들이 기록되어야 해요.


가치는 상관없다. 읽는 사람도 상관없다. 내가 하는 생각이고 내가 가진 고집이니 오로지 나만이 적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장에 대한 것은, 지금 나의 불운에 대한 것은 오늘 새벽에 다시 적는 것으로 한다.


글을 쓴다. 계속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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