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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Oct 06. 2021

참으로 흐릿한 삶입니다

스물여덟의 인생.



김해 김 씨의 선산에서 바라본 풍경.





이 모든 한없이 흐릿한 삶들이 기록되어야 해요.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중




*




두 권 연속 버지니아 울프의 책을 읽고 있으니, 저도 그녀처럼 막막한 벽에 저항하는 것만 같은 조곤조곤한 말씨로 적어 볼까요. 벌써부터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막상 이야기할 것들은 별것도 아닌, 그저 저한테만 막막한 불운일 뿐인데요.


백신을 한번 맞고 나니 일이 하기 싫어 혼났습니다. 상투적인 직장인의 투정 같은 '출근하기 싫다'가 아니라 '나는 더 이상 이 일이 하기 싫다'라는 이상한 생각이 어느샌가 자리를 잡더니 걷잡을 수 없어 커져있었습니다. 사실 이런 생각은 직장을 다니는 누구나, 재능과 미래에 확신이 없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지요. 하지만 저만큼은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인간입니다. 이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이 일을 하면서 행복하지 않았다면, 보람을 느끼지 않았다면, 근무하는 내 모습에서 아무 의미도 찾지 못했다면, 저는 결코 이 일을 이만큼이나 해오지 않았을 거예요. 서비스직은 저를 돋보이게 하는 분야인 듯했습니다. 바 안에 들어가면 저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밝고 즐거웠어요. 새로운 손님이 찾아오는 것이, 오래된 손님을 다시 만나는 것이, 바라는 공간 안에서 피어나는 모든 이야기가(술과 관련한 것이라도 그렇지 않은 것이라도) 저는 너무나 소중했습니다. 직장생활에 울상을 짓는 친구들 앞에서 늘 '나는 내 일이 너무 좋아. 천직인가 봐.'하고 말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던 제가 '더 이상 이 일이 하기 싫다'라니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란 말입니다.

사실 일을 하기 싫어진 것에 이유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추석을 앞두고 긴 연휴를 보내는 직장인들에게 너무나 부러운 마음이 들었지요. 나도 저렇게 쉬어봤으면, 나라가 정해준 휴일을 즐겨봤으면. 그때의 저는 추석 연휴 끝자락을 쉬기 위해 3주 동안 주 6일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받은 휴가 같지 않은 휴가는 (백신 다음날을 하루 껴서) 사흘이었어요. 3일, 3일을 쉬기 위해 3주를 일주일에 하루만 쉬고 일한 겁니다.


일을 갓 시작했을 때는 건강을 챙긴다고 조깅이며 수영이며 이런저런 것들을 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꿈도 꾸지 못합니다. 하루 아홉 시간씩 서서 일하는 데다 편도 한 시간 거리를 덜컹덜컹 퇴근하고 나면 발바닥은 화끈거리고 기력은 쭉 빠져있습니다. 피곤해졌습니다. 바 안에서 누군가의 비위를 맞춰주는데 지쳤습니다. 나도 어딘가에 손님으로 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백신 1차 접종과 2차 접종 사이의 5주 동안 저를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생리할 때가 늦어져서 그런 걸까, 호르몬의 농간과 백신 후유증의 무기력과 어떤 무언가 까지 겹쳐오는 바람에 이렇게나 내가 하는 일이 싫어진 걸까. 저는 고민했습니다.



분명히 내 직업이, 내 직장이, 내 주변의 모든 것이 6월에는 눈부시고 자랑스러웠습니다.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도무지 모를 노릇이었습니다.



추석에 사흘을 쉬고 와서, 직원들은 수습이 끝났다는 증명으로 근로계약서를 썼습니다. 세금을 제외한 월급은 이백만 원 언저리. 기본급은 최저시급을 아슬아슬하게 넘는 정도였습니다. 내가 업계에서 일해온 가치가 최저시급을 조금 넘는 수준이 고작인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나는 쓰레기가 된 기분으로, 보증금을 모을 의욕도 의지도 없이 껍데기처럼 하루를 보냈습니다. 사대보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훤한 백주대낮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강탈을 당하고 허망하게 서있는 느낌이었습니다. 뭉텅 내 돈을 가져간 놈에게 항변도 한번 못해보고 머릿속으로 생각만 했습니다. 나는 이 일이 하기 싫다고. 이런 일은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12월이면 어떻게 해도 동생의 집을 빼야 하기 때문에 새 집을 구해야 했습니다. 가능하면 직장 근처가 좋겠지요. 가뜩이나 하기 싫던 일에 근로계약서의 박봉까지 겹쳐 끔찍한 생각만 들고 있는데 엄마가 나를 위로했습니다. 이백이면 사대보험을 떼고 나서도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기운 내라고. 그래서 이럴 땐 있으나 마나 한 엄마라도 있는 게 좋네, 했었지요. 아빠와 이혼해서 출가한 엄마는 이제 우리(나와 동생)와 남입니다. 그래도 안부를 궁금해할 때 종종 만납니다. 그냥 그런 사이의 엄마입니다.(김해 김 씨와 경주 김 씨 사이에는 아아주 기가 막힌 역사가 있지요) 엄마는 아빠의 대출 이자를 갚아주겠다면서 헐값에 동생의 땅을 가져갔습니다-명목은 동생이 성인이 될 때까지 못 미더운 빚쟁이 아빠의 손에서 그 땅을 지켜주겠다는 거였지요-그 빚은 아빠가 엄마와 결혼생활을 했을 때 끌어다 쓴 빚입니다-우리는 그걸 잘 알아요. 엄마의 사치와 겉치레를-. 그리고 120년 된 소나무가 있는 그 땅에는 김해 김 씨의 선산이 있습니다. 글 쓰는 사람의 증조부와 증조모, 모두가 사랑한 친할아버지가 그 산 사과나무 아래에 묻혀계십니다. 우리는 아빠의 집에 갈 때마다 봉분 앞으로 인사부터 드리는 것이 순서입니다. 매번 절을 올리며 아주 많이 보고 싶었다는 말과, 자주 못 찾아뵈어 죄송하다는 말로 시작하는 기도를 하지요. 그곳은 저와 동생의 특별한,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득 쌓인 곳입니다. 우리는 그곳을 사랑합니다. 우리의 뿌리가 거기에 있다는 게 느껴집니다. 지금 그 땅은 엄마의 이름으로 되어있습니다. (엄마가 동생이 크면 되돌려줄 것이고, 아빠의 대출이자를 갚아주겠다는 말에 헐값이라도 믿고 넘겼으니까요) 그런데 그 땅 위에 지어진 아빠의 작은 집은 동생의 것이지요(아빠가 동생에게 주겠다고 했으니까요). 그리고 우리에겐 노쇠하신 친할머니가 계십니다. 하얗고 마른 팔순의 노인, 치매에 걸린 친할아버지를 3년 동안 집에서 홀로 돌본 친할머니요. 우리는 친할머니를 선산에 모실 겁니다. 친할아버지의 바로 옆에, 같은 사과나무 그늘이 드리우는 곳에. 피곤하고 지친 몸을 끌고 퇴근한 어느 날, 동생이 말했습니다.


"엄마랑 싸웠어."


엄마가 할머니를 자기 땅에 묻을 수 없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며느리 적부터 아들 없이 딸만 둘 낳으며 받은 눈치와, 눈독 들이던 할아버지의 큰 땅이 작은아버지네 장남의 명의로 돌아간 것에 대한 애꿎은 분노를 이미 죽은 노인네의 몸에다가 푸는 것이었습니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엄마는 이제 우리 집안사람이 아닙니다-  동생은 터무니없는 소리에 제 땅을 잠시 맡아주는 거 아니었냐고 화를 냈다고 합니다. 엄마가 계속 외친 말은 이거였습니다.

내 땅이야, 내 땅! 괘씸하게 내 땅에 뭘 더 묻어!


어쩌면 이렇게 혐오스러울 수가 있을까요. 심지어 아빠에게 약속한 대출이자도 처음 두세 달을 빼고는 한 번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무려 약속까지 불이행해놓고는 (날강도처럼 가져간) 땅에 대한 권리만 주장하다니요! 나는 당장 엄마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엄마가 우리를 낳았다면, 우리를 사랑한다면, 우리를 아낀다면, 나는 내 말이 엄마에게 할머니에 대한 노여움을 풀고 그 땅이 언젠가 온전히 동생에게 갈 것이며 아빠의 대출이자도 다시 갚아주리라는 대답을 하게 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왜 나와 동생은, 그리고 아빠는 엄마를 믿을 때마다 둘 도 없을 만큼의 배신을 당해야 할까요.


그날 나는 엄마와의 연이 끊겼습니다.




우습게도 나는 두 달 전에 엄마가 돈이 없다는 말에 내가 모은 보증금을 엄마에게 주었습니다. 내가 집을 구할 때면 돌려주겠다는 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그날 엄마도 보증금도 잃은 겁니다. 후회는 하지 않지만 헛웃음이 나오는군요. 이런 엄마를 가족으로 둔 것에, 아직 선산은 여전히 엄마 명의고 대출이자는 아빠가 힘겹게 갚아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말이에요. 허, 참!




그렇게 영혼이 다 빼앗긴 사람처럼 털레털레 출근하는데 일요일마다 문을 닫았던 가게가 10월부터는 연중무휴로 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 가게는 바리스타는 셋이고 바텐더는 나 하나입니다. 한 바리스타가 쉬는 날엔 다른 바리스타가 출근하면 되지만, 여분이 없는 바텐더는 그럴 수 없습니다. 바텐더의 스케줄은 어찌 되냐 사장에게 물어보니 '생각해본 적 없다'는 말이 돌아왔습니다. 되물어볼 기운도 나지 않습니다. 그렇죠, 인생이란.


지금 저는 십 일일을 일하고 하루를 쉴 수 있습니다. 그 하루를 쉬고 나면 그다음은 언제 쉴지 알 수 없습니다. 가게는 쉬는 날 없이 다 열 테고, 바텐더는 여전히 저 하나고, 제 자리를 채워줄 사장은 제 휴무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으니까요. (올해의 긴 추석 연휴에 했던 생각이 스쳐 지나가네요) 오늘은 연근의 여드레째 되는 날입니다. 고단합니다. 볼 멘 소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이 모든 것에서 좀 벗어나고 싶습니다.



나는 일하기도 싫은데 적은 급여를 받는다는 계약서에 사인을 했고 연을 끊은 엄마는 그나마 내가 모은 보증금을 홀랑 삼켜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저는 휴무 없이 11일 근무를 하라는 소리를 들었지요. 남은 휴무도 언제일지 모르는 채로 그저 살아가는 것이란 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요.



이것이 지금까지 저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백신 후유증도, 생리현상의 호르몬 탓도 아닌 순전히 들끓는 불운들이요. 지금의 회사에서 계약기간이 끝나면(만약 온전하게 끝낼 수 있다면), 저는 농사짓는 아빠의 시골집에 내려가서 한 몇 달은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서울에 있는 것은 너무 힘이 듭니다. 좌절하게 만들고 세상이 차갑게 느껴지게 합니다.




이 한없이 흐릿하고 보잘것없는 삶을 기록합니다.

내가 아니면 없을 이야기이기 때문에 기록합니다.

지금의 서러움과 짜증을, 먼 훗날에는 엄살처럼 보일  작은 시련을.

그래도 죽지는 않겠지요(일주일 전엔 정말 죽을 뻔했습니다). 엄마에게 소송을 걸어야 하니까요.




버지니아 울프가 원했던 방향은 아니었겠지만, 아침에 개운하게 변을 본 것처럼 기분이 괜찮아지는군요. 140년 전에 살다 간 위대한 페미니스트가 하는 말은 듣고 볼 일인가 봅니다. 맞아요. 참으로 흐릿한 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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