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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Oct 01. 2021

그저 내 머릿속에 가득한 것은

퐁! 튀어 오르는 통 속에 해적 아저씨.


이 장난감의 원형은 '주정뱅이의 망토'가 아닐까!



주정뱅이의 망토라는 것도 있다. 와인 통을 구속복으로 사용하는 방법인데, 이에 대해 미국 남북전쟁 시기 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형편없는 범법자는 한쪽에 뚫린 구멍으로 머리를 내밀고 반대쪽 바닥이 제거된 오크통에 몸을 넣은 처참한 몰골로 마을을 돌아다니며 반만 부화된 병아리처럼 세상을 탐색한다."

1680년, 매사추세츠 베이 주지사 존 윈트롭은 로버트 콜이라는 사람이 "술에 취해 자주 벌을 받는데, 아예 커다란 붉은 D 글자를 1년간 목에 걸고 다니도록 하라"라고 지시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 모욕적인 목걸이가 <주홍글씨>의 진짜 원조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쇼너시 비숍 스톨, <술의 인문학>

예로부터 전해 내려 온 여러 주정뱅이 처벌 방법들 중 하나


​​

*​


요즘 '술독에 빠지다'라는 말이 딱 맞게 살고 있다. 출근을 안 하는 날이 없으니 고주망태는 되지 못하지만 퇴근이 코앞이면 벌써부터 집에 가서 먹을 맥주 생각에 군침이 돈다(집에 가는 데는 지하철로 한 시간 반이 걸린다). 술을 먹는 데는 별 이유가 없다. 술이라도 먹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해도 영 술을 즐기지 않던 나는 하루에 기본으로 맥주 서너 캔이 기본인 동생의 삶이 신기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한 캔, 밖에 나갔다 오면 한 캔, 글을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으면 한 캔, 내가 퇴근하면 저녁식사와 같이 한 캔. 술이 맛있어서 먹는 걸까, 마시면 뭐가 다른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맥주도 소주도 위스키도 굳이 따지면 그것보다 맛있는 음식이 많은데 하루에도 몇 번씩 네 캔 만원 하는 세계맥주에 돈을 쓴다. 나도 이제 술이 없으면 견딜 수 없다. 술 없이 세상은 살아가기에 너무 팍팍한 곳이다.

글을 쓸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는 건지, 아니면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서 글을 쓰게 되는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나는 인생에 스트레스가 없던 적이 없는 건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작년부터 오랜 공백을 깨고 글쓰기를 시작한 이래로 단 한 번도 희망적이고 찬란한 얘기를 쓸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늘도 더 나쁜 말들을 하고 싶지만 이 짓도 작작 해야지 싶어서 밤마다 술을 마시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술, 술이 필요하다. 더러운 세상살이에 술도 없으면 다음날 출근을 꿈도 꿀 수 없다.

인생이 *같았던 첫날은 해물파전에 닭똥집 볶음을 안주 삼아 마셨다. 둘째 날은 두부김치와 계란말이와 함께 맥주 한 페트. 셋째 날은 얼큰한 가락국수에 돼지 두루치기를 곁들여서 멕시코 맥주 두 캔. 어차피 내일도 출근이고 모레도 출근이다. 사장에게 돌아오는 휴무를 물어보니 생각해본 적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돈 이백 받고 이러고 살고 있다. 쉬라고 할 때까지 계속 일한다. 그래서 술을 마신다. 퇴근하면 술을 마시고 눈을 뜨면 출근을 한다. 겁이 많으니 알코올 중독은 못되더라도 내 인생이 한심해져가고 있다는 건 아주 잘 보인다. 오늘도 퇴근하면 술 한잔 하게 될 것이다. 매콤한 곱도리탕을 팔팔 졸여서 대창 조각을 건져먹으며 술잔을 홀짝일 상상을 한다.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계약이 끝나 있겠지. 그러면 훌쩍 떠날 수 있겠지.


맨 위의 문구는 어릴 때 가지고 놀던 통속에 든 해적 장난감이 생각나 옮겨 적었던 것이다. 미리 파인 홈에 플라스틱 칼을 쏙쏙 끼워 넣으면 그중에 하나가 스프링을 건드려 띠용 하고 위로 튀어 오른다. 해적 아저씨를 탈출시킨 사람은 벌칙을 받는다. 운이 없었으니까. 작가가 해놓은 묘사는 딱 그 꼴이다. 오크통의 바닥을 뚫고, 위쪽엔 머리가 들어갈 만한 구멍을 내고 사람을 그 안에 집어넣어 뒤뚱뒤뚱 돌아다니게 만드는 것. 심지어 이름은 늠름하고 같잖은 '주정뱅이의 망토'다. 아주 재미있는 말이다.

나도 옷 대신 와인을 담았던 나무통을 입는 상상을 한다. 내일이 출근이면 일하기 싫다고 술을 들이켜고, 휴무를 받으면 내일은 일을 안 한다고 술을 부을 테니 이렇게 마셔대다간 동네 편의점 맥주가 다 털려버릴 것이다. 매일 술을 마시고 싶다. 매일매일, 일이 끝나면 찾아오는 모든 밤마다.

어젯밤 진탕 마시고 <나는 왜 쓰는가>를 다 읽고 잤다. 낭독회를 신청할 때까지만 해도, 인생이 *같다고 생각하기 전까지만 해도 감회가 새로운 독서를 하고 있었는데 술에 잔뜩 취해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니 이튼스쿨이고 간디고 자시고 알 바가 아니다. 그 좋은 에세이들을 두고도 머릿속을 채우는 건 당장 다음 달에 계획했던 것을 단 하나도 이루지 못할 지갑 사정과 물이 새고 바퀴벌레가 나오는 이 집에서 하루라도 빨리 이사를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낭독회 전까지 이 훌륭한 책으로 뭐라도 써낼만한 정신력이 나올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이 공들여 쓴 것들을 듣고 박수나 치고 싶다. 내가 만들어내는 건 똥이요 오물이요 영 글러먹은 것들 같다.

통속에 들어간 해적, 우스꽝스러운 처벌을 받는 범법자 주정뱅이.

싱가포르든 한국이든, 내가 있는 곳이 지옥인가 보다. 오늘은 대창에 소주를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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