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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Mar 29. 2021

계속 불편해하겠습니다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감상




 


우리는 영화를 즐기고 책을 읽고 여행을 다니며 직간접적으로 다른 문화와 상황을 접한다. 겪어보지 못한 기아나 기근을 보며 마음 아파하기도 하고 눈부신 인간드라마와 로맨스를 보며 사랑을 꿈꾸기도 한다. 실제로 자행되었던 여러 전쟁들에 대한 매체를 보고는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지나온 과거에 인간이 인간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동물이었다는 것을 믿기 힘들다.


 

많은 것을 느낀다. 옮고 그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할 수 있을 정도로, 신념과 가치를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시행착오를 지나 여기까지 왔다. 이 정도면 많이 온 줄 알았는데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길이 남을 명작들은 너무나도 많지만 그것들은 어딘가 먼 세계의 이야기 같다. 서구 열강의 원주민 침략. 유행하는 역병. 마녀 사냥. 왕족의 몰락. 노예 제도. 크고 작은 전쟁들. 나치와 홀로코스트. 여성의 투표권 투쟁. 동족상잔. 당연히 불편해야 하는 것들이다. 권력과 이념에 심취한, 말도 안 되게 어리석은 인간들의 어리석은 판단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에 혀를 찬다. 인류의 부끄러운 오점들을 보면 마치 나는 행복한 세계에 사는 것 같다. 전쟁도 민족적 탄압도 없고 여성도 투표를 할 수 있는, 그 시대의 기준에서는 평화롭고 유토피아 같은 곳에.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이렇게 물렁해져 가고 있는 나의 죄의식을 깨운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에서 한 발짝 뒤에 선채로 방관하고 있던 오류와 실패한 교육들을 낱낱이 끄집어낸다. 무례하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담담하고 세밀하게. 토를 달 수 있는 여지도 없다. 화를 내기에 저자는 너무나 완곡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 세대가 얼마나 망가져 있는지를 말이다.


 

친구들이랑 편하게 얘기할 때 ‘병신 같아’라는 표현을 쓰곤 했다. 멍청하거나 하거나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고는 자조의 의미로 사용했던 말이었다. 이 말을 쓰지 않은지 3년이 되었다. 이 글을 쓰느라 예전의 내가 어떤 말투로 ‘병신’이라는 단어를 썼는지 입으로 되뇌어 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무서울 정도로 벼린 말이다. 사람이 아주 못돼 보인다. 일상생활 속에, 내 또래의 친구들 사이에서 비속어는 전부 인권을 침해하는 비하 단어다. 그 사실을 자각하게 되면 한 번 내뱉을 때마다 목구멍에 모래라도 끓는 것 같다. 우리는 언제부터 타인의 장애나 질병을 한낱 욕지거리로 쓸 수 있는 세대가 되었을까. 대수롭지 않은 듯 말머리와 어미에 장식처럼 ‘시발’을 붙이는 세대가 되었을까.

시작은 사소하다. 나는 내가 쓰던 말들이 불편해졌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말들도 불편해졌다.

 


한국의 지하철 시스템은 편리하다. 세계 어딜 가도 따라올 재간이 없을 정도다. 일본 여행을 가서 지하철을 탔을 때 내 칸에는 휠체어를 탄 사람이 셋 있었다. 역사와 도로 곳곳에도 왕왕 보였다. 일본이 장애인이 많은 나라라고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일본은 보호자 동행 없이도 휠체어로 나들이가 가능한 나라라고 하고 싶은 것이다. 싱가포르를 오는 길에 캐리어를 끌고 지하철 공항철도를 탔다. 까마득한 일이었다. 멀쩡한 두 다리가 있을 때는 훌훌 올라 다니던 길이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를 찾는 것 만으로 두 배가 걸렸다. 이럴 때 나는 내가 비장애인이고 관절이 양호한 사람이라는 것에 그저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걸까? 어제도 시위로 열차 운행이 지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이를 키우는 친구가 운전면허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세상이 너무나 살기 편안하다면, 다른 사람들이 너무 불만이 많은 것 같다면 그것은 당신이 기득권이라는 말 밖에 되지 않는다. 타고난 행운으로 타인의 불편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시선을 돌리고 그들의 입장을 헤아릴 시도조차 하지 않은 오만한 차별주의자.


 

왜 불필요한 비하 단어를 사용하시나요? 직원으로서 듣기 좋지 않습니다.

성적인 농담을 하지 마세요. 여성으로서 불쾌감을 느낍니다.

장난이라도 폭력적인 제스처를 취하지 마세요. 성인 남성의 시늉은 충분히 위협적입니다.

성소수자를 우스갯소리로 소비하지 마세요. 저 역시 성소수자입니다.


 

불편한 게 많은 사람이라 세상이 불편한 것들 투성이다. 나 하나라도 다른 사람을 같은 주제로 불편하게 하기 싫어 끊임없이 검열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나를 만나는 사람에게도 말한다. 나는 이런 것들을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불편하지 않도록 나 역시 노력할 테니 내가 불편해하는 것들에 대해 알고 있어 주었으면 좋겠어요.


 

대부분은 선량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이라 내 앞에서 멈칫하며 조심하는 모습들을 보인다. 그 정도로 충분하다. 습관적이고 일상적인 것들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중요한 일이다. 알기 전까지는 바뀌지 않는다.


 

나도 홀로코스트 영화를 보며 나 자신은 유대인 척살에 찬성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일제 강점기의 영화를 보며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나 역시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었다. 이제는 그런 이상을 버린다. 나는 어떤 분야에서 자각도 하지 못하고 있는 차별주의자고, 내가 바라는 것만큼 깨끗하지도 무결하지 않다. 한 민족의 말살에 은근슬쩍 동조하거나 외면하고 독립운동은커녕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성을 바꾸거나 머리칼을 자르는 짓을 했을 수도 있다. 자랑스러운 짓은 되지 못하겠지만 세상의 대부분은 그렇게 사회와 문화가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며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가 잘못된 일이라고 회초리를 들지 않으면 숨을 구석이 있는 그늘로 몸을 피하며 자신을 합리화한다. 인간은 하자가 있는 생물이다. 평생 스스로도 모를 차별들을 하면서 실수투성이로 지내겠지만 어제보다는 오늘이 조금 덜 모자란 인간이고 싶다.


 

계속 불편해할 것이고 그것을 이야기할 것이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되도록 외치고 다닐 것이다. 모두가 사상과 언행에 신중해지는 세상을 원한다. 한 마디의 말을 할 때라도 경솔하지 않게 되는 세상을 바란다. 나 죽을 때까지 해결되지 않을 많은 문제들이 지구를 둘러싸고 있지만 내 주변에서 만큼은 변화가 보인다. 우리는 타인의 눈치를 봐야 한다. 다른 성별에, 다른 출신에, 다른 환경에, 다른 조건에 눈치를 보는 것이 곧 배려다. 당연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모두 특권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들이 많은 사람이 가지지 못한 자들을 소수자와 열성 인자로 나누어 차별한다. 우리는 더 눈치를 봐야 한다. 검열해야 한다. 스스로가 얼마나 좁은 시야와 안온한 환경에 갇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세상은 편하지 않다. 아름답지 않다. 당연하지 않은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끔찍하고 날카로운 곳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고 느낀 단상을 이쯤에서 줄인다. 스스로를 예쁘게만 보는 것을 인간은 그만둬야 한다. 불편한 것을 불편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되려 눈치를 주는 일을 멈춰야 한다. 이렇게나 삐뚤어진 세상에 불편하면 안 되는 이유는 뭔가. 다름을 틀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의아한 티를 내면 안 되는 이유는 뭔가. 식견의 좁음을 ‘당연함’으로 뭉뚱그리는 군중에게 한심함을 내비치면 안 되는 이유는 뭔가. 사람은 선량하지 않다. 차별주의자 치고는 선량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속알머리가 근지러웠던 불편함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준 작가에게 감사를 표한다. 이 책이 아니었으면 나 역시도 어떤 부분은 한없이 옹졸한 채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 책을 보고 괜히 혼난 듯한 기분이 들 수도 있다. 지금까지는 아무 말 한하던 선생님이 갑자기 이름을 적고 반성하라고 말한 듯한 기분이 들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반성하면 된다. 콧대를 세우며 나는 아닌데. 이 정도로 잘못한 건 아닌 것 같은데. 하는 게 아니라 한 번쯤 다시 생각하고 뒤돌아보면 될 일이다. 이 책이 좋다. 지구 위 대부분의 인간에게 반성해야 한다고 나무라고 있는 듯한 이 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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