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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Apr 02. 2021

제모 이야기

내 몸의 털에 대하여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정치 대 문학 <걸리버 여행기>에 대하여’ 중

인간의 신체는 아름답다. 그런가 하면 인체는 역겹고 우스꽝스럽기도 한데, 이는 아무 수영장에나 가보면 확실히 검증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인간의 성기는 갈망의 대상이기도 하고 혐오의 대상이기도 한데, 예컨대 다는 아니어도 많은 언어에서 성기의 명칭 자체가 욕설로 쓰인다. 고기는 맛있지만 푸줏간에 가면 속이 메스꺼워진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먹는 모든 음식은 궁극적으론 다른 무엇보다 우리가 끔찍스러워하는 똥과 시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유아기를 지나도 세상을 여전히 새로운 눈으로 보며, 경이로움 못지않게 혐오스러움에도 마음이 움직인다. 이를테면 코딱지와 침, 인도에 싸놓은 개똥, 구더기가 가득한 채로 죽어가는 두꺼비, 어른의 땀 냄새, 대머리에 주먹코인 노인의 흉한 몰골이 주는 혐오감에도 크게 끌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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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릴 적엔 사람의 몸을 좋아했다. 확대된 근육과 살, 피부를 그리는 것이 좋았다. 실 한오라기 걸치지 않은 인간의 거죽이란 얼마나 적나라하고 시사적인가. 스스로의 몸을 보면서도 생각한다. 미디어에 보이는 많은 나체들, 반즘 벗은 조각상 같은 몸들을 보면 인간에 대한 현실감이 날아간다고. 눈썹이며 미간, 손발가락에 짧은 털이 나있고 가까이서 보면 팔다리 전체가 부숭숭하다. 입가와 코 아래엔 종종 수염도 난다. 몸 곳곳에 아물지 않는 흉터와 점들도 보인다. 눈에는 닿지 않지만 귓속도 귀지로 엉망일 것이다. 매일 샤워를 해도 팔꿈치 안쪽이나 무릎 뒤에 때가 밀려 나올 수도 있다. 인간의 몸은 걸어 다니는 쓰레기 공장이다. 매일 대변과 소변을 배출하는 통로가 어떤 꼬락서니 일지는 상상도 하기 싫다. 한 꺼풀 까 보면 인간도 정육점에 걸린 소와 다를 게 없다. 내장은 지방과 피로 꽉 차있고 군데군데 찌꺼기가 끼어있을 테지. 나긋나긋하고 향긋한 육체는 어디에도 없다. 문명 속에 살고 있을 뿐 세척하지 못하는 내장은 온 세상이 똑같다.​


이십 대 초반에는 여름마다 면도기로 팔다리의 털을 밀었다. (애인이 있을 때는 겨울에도 밀었다) 겨드랑이에 샤프심 같은 터럭도 샤워할 때마다 꼬박꼬박 밀어내 사시사철 민둥 한 상태였다. 기분이 내키면 성기 주변의 털도 밀었는데, 샤워하며 매번 다듬는 것이 귀찮아 몇 번 해보다가 말았던 기억이 있다. 아침마다 거울을 보며 족집게로 얼굴에 난 잔털을 정리하고, 눈썹 칼로 손 발에 털도 삭삭 걷었던 스무 살. 몸에 붙는 원피스를 입고, 높은 가보시 힐을 신고 뿌듯했던 스무 살. 거울 속에 내가 너무 예뻤던 스무 살.

여름나라에 오고 자가격리 중에 성기의 털을 몽땅 밀었다. 욕조가 있는 욕실이라 말끔하게 다듬고 헹구기도 편했다. 비키니를 입을 생각 따위는 없었지만 공용으로 사용할 숙소 욕실에 꼬불꼬불하게 흉한 털이 적어도 내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으로 공들여 정리했다. 털의 심만 남아 매끈하고도 까슬한 고간은 묘한 중독성이 들게 한다. 한번 밀어놓으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밀게 된다. 면도기 하나면 충분하니 돈도 수고도 필요 없다. 생리할 때 피가 엉겨 붙을 것이 없으니 땀도 덜 날 것이다. 나의 여름 준비는 셀프 브라질리언 왁싱으로 시작했다. 시원하게.


코로나와 함께한 백수 생활 중에 겨드랑이 털을 길러 보았다. 길렀다기 보단, 그저 밀지 않은 것뿐이다. 내버려 두면 아빠나 전 애인들의 것처럼 수북하게 자랄까 기대했는데 몇 개월의 묵인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보기 싫은 기장에서 실험은 끝났다. 싱가포르행 비행기를 끊고서 겨드랑이 털을 다시 밀었으니까.

팔과 다리는 내버려 두고 있다. 가져온 옷이 대부분 긴 팔 긴바지인 데다 생각보다 에어컨 바람이 쌀쌀해 보온용으로도 털이 필요할 것 같다. 그저 편한 것은 어릴 적처럼 샤워하며 오분 십 분을 몸 한 바퀴를 빙 돌아 털을 뽑는데 쓰지 않는다는 거다. 눈에 보일 때. 조금 거슬릴 때. 할만한 시간이 남을 때 그제야 면도기를 들고 자세를 잡는다.  미디어에서 보이는 예쁜 몸들은 다 빚어서 깎아서 만들어진 것들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살아가는데 바쁜 인간은 그렇게 단장할 여유가 없다. 겨드랑이와 성기의 털을 밀고도 십오 분 안에 샤워를 끝낸다. 깔끔하고 개운하다.​



제모의 유무는 애인의 유무와 같다는 걸 알았을 때가 꽤나 비참한 기분이었다. 벌거벗어도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마음에 혼자서 열심히 몸 구석구석 로션이며 향수를 처발랐던 스무 살. 그 누구도 다리에 털이 무성하다고 헤어지자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때의 나는 항상 매끈했다. 그리고 그렇게 보이고 싶어 했다. 마치 몸에 하나의 지저분한 흔적도 없는 것처럼, 털은 애초에 나지도 않았던 것처럼. 오일을 바른 듯 번들거리고 유혹적인 몸을 유지하고 싶어서 그렇게 부지런히 굴었다. 모두 부질없는 노력이었다. 지금 혼자 있는 나는 너무나 완전하고 편안하다. 속옷 한 장 걸치고 거울 앞에 서도 만족감에 자신감이 솟는다. 나는 멋진 몸을 가지고 있다.​


머리숱과 눈썹숱이 원체 많은 나는 다른 곳에 나는 털도 성기고 두껍다. 영 보기 좋은 꼴은 아니니 선택할 수 있다면 동생처럼 눈을 가늘게 뜨지 않으면 안 보이는 가닥들을 골랐을 것이다. 그래도 돈을 내고 제모를 해 본 적은 없다. 손톱과 발톱이 자라듯이 레이저로 뿌리를 뽑은 털들도 다시 자라 내 몸을 덮으려고 발악을 할 텐데 그것을 기계의 힘으로 무슨 수로 막나. 되풀이될 일이라면 돈을 쓰고 싶지 않다. 같은 맥락으로 머리 염색이나 네일아트, 미용 시술 등에도 관심이 없다. 자라나는 머리 뿌리와 부러지는 가짜 손톱들에 신경 쓰고 싶지 않다. 더구나 샤워하면서 면도기질만 몇 번 하면 될 것을 다른 사람이 내 다리 사이에 약을 발라 털을 벗겨준다니. 나에게는 도저히 견디기 힘든 수치다. 돋아나는 성기 털에 간지럼을 안 느끼는 체질이라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이 간편하고 쾌적한 브라질리언 왁싱을 평생 해볼 일 없었을 것이다. 다리 사이에 바람이 부는 건 좋은 일이다. 한결 몸이 가벼워진다.


인간의 몸을 그렸던 생각을 하다가 여기까지 왔다. 하나도 이상적이지 않지만 필터를 씌우고 바라보면 참 아름다운 창조물인 인간의 몸. 트림을 하고 눈곱이 끼고 색깔 다른 똥을 싸지르는 인간의 몸. 이렇게 더러우면서도 더럽지 않은 척하느라 인생에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인간의 몸. 모두 똥을 좋아하는 어린 시절을 보냈으면서 지금은 화장실을 갔다 온 티를 내기 싫어하는 어른이 되었다. 늘 뱃속에 똥을 담고 있는, 곱창과 똑같이 독한 약을 쓴 세척이 필요한 내장을 가졌다.


부모님을 소중히 하면서도 부모 욕이 왕왕 들어가는 비속어를 쓴다. 인간이 제일 멸시하는 것은 인간이다. 겉모양은 다를지라도 속 알 머리는 똑같은 구조의 똥통들.


아름답고도 혐오스러울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제일이다. 삶과 죽음은 지척에 있는데 인생은 경탄하며 시체는 관짝에 넣어 묻어버린다. 지금도 자라고 있을 털들과 장을 타고 내려가 대장 끝에 쌓일 찌꺼기들에게 안녕을 보낸다.



조지 오웰이 묘사한, 아름답고도 그렇지 못한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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