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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Jun 16. 2022

완벽한 인간이 되어서 오겠다구?

아직 똥구멍도 빠지지 않은 놈이 말이야



바둑이, 잘 지내고 있니?


​​

"뭐, 뭐, 완전한 인간이 되어 오겠다구.

야 이 새끼야, 내가 똥구멍이 빠지게 책을 읽어도

완전한 인간은커녕 불완전한 인간도 못되구 있는데, 네 놈이 완전한 인간이 되어 온다구?

건방진 놈 같으니라구."​


 <김수영 평전> 최하림, 본문 중


​​

*​

글방을 진행하다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했다.

며칠 내내 스스로가 상한 막걸리 같다는 생각을 한다.  역겨운 냄새를 감출 수 없는.

처음 진행하는 것 치고는 잘하는 것 아닌가 하는 안일한 생각을 했다. 감히 다른 진행자들보다 내가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주제도 모르고.

나 자신의 부족함을 어째서 정작 나는 이성적으로 볼 수 없는 건지. 왜 내 눈에 비치는 건 내가 아니라 남들 뿐인지. 나 같은 사람이 나를 본다면 가장 더럽고 냄새나는 것은 바로 나일 것이다. 코를 쥐고 뒷걸음질 치게 하는, 그런 사람.

뱃속에서 소용돌이가 들끓는 것 같은 느낌을, 관자놀이에 장도리를 맞는 것 같은 느낌을 알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따님이 문제집 한 권을 문제풀이까지 통째로 베껴서 숙제로 냈다고 학원에서 전화가 왔을 때. 중학교 2학년, 과학 과목을 커닝한 것을 3학년 선배들에게 들켜서 교무실에 갔을 때. 1 지망 대학교 실기시험에 늦잠 잤을 때. 이상한 곳에서 일하게 됐을 때. 술을 진탕 먹고 빌라 계단에 줄줄이 토를 해놨을 때.

그때마다 배꼽을 눈으로 삼은 폭풍이 몰아쳤다. 누군가에게 창피하고 부끄러운 느낌, 회피하고 싶지만 기어코 도래하게 될 어떤 순간을 앞에 두고 늘 그랬다. 너무 옛날 같아서 잊고 있었다. 인생에 일정한 주기를 두고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나의 부주의함, 오만함, 경솔함.

알고 있는 기분이라서 내상이 깊다. 이 나이쯤 되면, 이만큼 어른이 되었으면 더 이상 그런 어린애 같은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주기만 조금 길어졌을 뿐 어김없이 뱃속을 휘젓는다. 달팽이관 안쪽에 곰팡이가 피었다. 곰팡이의 이름은 '네 잘못이야'다. 눈꺼풀 안에도 해충이 들어왔다. 자책이라는 벌레다. 그 벌레는 눈만 감으면 뇌까지 다 울리도록 '넌 왜 항상 그 모양이냐'라는 소리를 내면서 날아다닌다. 뱃속에는 폭풍인데 머릿속은 메뚜기떼다. 밥맛이 뚝 떨어진다. 시간을 주워 담을 수 있다면. 그 순간 내가 했던 터무니없는 실수 중에, 그나마 몇 개라도 목구멍 뒤로 넘길 수 있다면. 인간은 언제 완벽해질까. 언제가 되어야 후회 없이 초연해질까.

모임을 진행하는 역할이 처음이니 어련히 사고도 치고 우여곡절을 겪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나아지고 발전하는 거라고, 그게 당연한 순서인 거라고. 그것마저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는 나이를 먹었다. 그런데 나의 첫 실수가 고질병 같은 버릇과 함께 누군가의 마음까지 상하게 하리라고는, 이렇게 커다란 흠으로 남게 될 줄은 각오하지 못했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적당히 곤란하고 어지간하면 무마할 수 있는 그런 것일 줄 알았다. 머릿속에서 다시 벌레가 왱왱 운다. 완벽한 인간, 완벽한 인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거지.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수 있는 거지. 얼마나 더 사람들에게 부족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거지.​


나도 모르게 내가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참 씁쓸하다. 내 안에서 나는 이 정도로 개차반은 아니었는데 현실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준다. 너는 가야 할 길이 멀어도 너무 멀다고, 잠깐의 안온함으로 안주하지 말라고. 마음을 놓으면 너는 또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조롱하고, 외면할 거라고. 그리하여 너밖에 모르는 외롭고 아둔한 사람이 될 거라고. 평생 그렇게 거울만 바라보고 혼잣말을 하는 채로 살게 될 거라고. 완벽한 사람,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어림도 없는 걸 알지만, 그래도 비슷한 것 발 끝이라도 가보고 싶었는데. 폭풍은 가라앉았어도 메뚜기는 계속 운다. 삼일 밤낮을 불어닥쳤으니 뱃속에는 이제 폭풍이 두렵지 않다. 실바람에 날아갈 것도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먹지 않으면 될 일이다. 하지만 꺼냈다 뺐다 할 수 없는 뇌와 눈알은 메뚜기 소리에서 도망갈 수 없다. 자려고 눈을 감으면, 가만히 머리를 굴리면 다시 벌레가 운다. 넌 왜 항상 그 모양이냐, 넌 왜 인생을 그렇게 사냐. 그 벌레의 생김을 상상한다. 어쩐지 노란색에 연두색이 섞인 배때지가 퉁퉁한 곤충일 것이다. 메뚜기. 메뚜기 떼.​


책을 많이 읽으면 더 나은 사람이 될 줄 알았다. 어중간한 사람은 되기 싫다고 내 생각인 척 말해온 것들은 어디까지 온전히 내 것이었나. 지금까지 읽어온 것들을 나는 어디로 아작아작 씹어 넘긴 걸까. 그중에 일부라도 내 안에 소화가 되긴 했을까. 어떻게든 내가 아는 나보다는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했던 치레들에 걸려 넘어진다. 내가 생각했던 나는 우스울 만큼 허상이다. 완벽한 사람, 완벽한 사람이 되어 오겠다구. 김수영도 되지 못했던 인간을 어찌 내가 노려볼 수가 있나. 김수영만큼의 책도 읽지 못하고, 김수영만큼의 글도 쓰지 못하고, 김수영만큼의 시도 쓰지 못하고. 쓰레기통 안에 아늑하게 들어있을 때 한 번씩 기운을 얻으려고 꺼내보는 문장이다. 그래, 완벽한 인간은 무슨. 태어난 값의 반푼도 하기 힘든 세상인데. 지난주에 묶여 질질 짜는 것보다 돌아올 글방이나 잘 꾸려갈 생각을 해야겠다.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것들을, 미숙함을, 불완전한 인간도 되지 못할 나의 멍청함을 되새기면서.

김수영이 똥꾸멍이 빠지도록 책을 읽어도 완전한 인간은커녕 불완전한 인간도 못된다는 말을 했으니,

이 정도면 나의 평생 과업이다. 셀 수 없을 만큼 건방진 놈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때마다 김수영의 문장에게 작신작신 두들겨 맞는 것 밖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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