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장 쓰러 간다!
나는 그 작품을 훨씬 더 많이 변형시키고 싶은 충동, 즉 수정해서 더 재미있게 만들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왔다. 이것은 꽤 강렬한 충동이다. 지금 그 작품들을 보면 너무 창피스럽기 때문이다.
스티븐 킹, <스탠 바이 미> 본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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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코가 석자다 못해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다. 중간고사가 한창인데 글쓰기 강의는 두 개나 신청해놔서 이틀에 한번 꼴로 합평받을 글을 써내야 한다. 사실 지금도 써야 하는 글을 안 쓰고 딴짓 중이다. 써야 하는데, 써야 하는데. 마음처럼 쉽지 않다.
최근 주야장천 섹스 얘기를 썼던 이유는 모 작가의 섹슈얼리티 주제 글방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남이 이야기하는 섹슈얼리티를 들어보려고 신청한 강의에 내 섹스 얘기만 실컷 했다. 그래도 이런저런 피드백을 들으니 뿌듯하다. 암요. 제가 섹스를 좀 좋아하긴 하죠. 부끄러울 거 뭐 있나. 다 큰 사람들끼리.
다른 건 4주 동안 자유주제로 글을 써서 보내고 합평을 받는 워크숍이다. 우먼 인 바, 바에서 일하는 여자에 대한 글을 진지하게 엮어볼 생각이라 초고에 생판 남의 조언을 받고 싶어 신청했다.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불안했는데 처음 제출한 프롤로그 글에 꽤 근사한 칭찬을 해주셨다. 써볼 만한가. 다들 궁금해하고 있을까. 한국 술과 바의 역사, 여자가 얘기하는 술, 여자가 바라보는 바. 그리고 술과 시가를 좋아하는 여성에 대해서.
합평을 칭찬으로 꽉 채워 들으니 자신감이 붙었다. 제대로 써봐야지, 집요하게 파봐야지 하고는 또 게으름을 피운다. 보는 사람들이 어디까지 알고 싶어 하고 어디부터는 관심 밖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한국의 현대사와 더불어 이런 이야기는 찔끔찔끔 꺼내놓을 수 있다. 평화시위 3.1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한국에 첫 기계식 소주공장이 세워졌다는 것. 조니워커, 시바스 리갈, 올드 파라는 블렌디드 위스키 명가들이 줄지어 등장한 1909년에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는 것. 역사가 꿈틀거린다. 투쟁하고, 살아남는다. 그 정도로도 기운을 다 뺄 만큼 힘들었던 시대.
당장도 섹슈얼리티에 대한 글을 써야 하는데 소재는 다 정해놓고 손을 못 대고 있다. 전쟁 강간에 대해 쓰고 싶다. 여성의 몸이라는 유형물이 어디까지 대상화되고 도구화될 수 있는지, 태어나기 전 제멋대로 결정되는 유전자의 농간에 왜 나는 하루하루 몸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지. 한국 영화에서 빠지는 것이 드문 것은 여성에 대한 관음적 시선이다. 영화 <항거>에서 기어코 열사를 벗겨놓는 작태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여성이라는 것은, 결코 여성의 몸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그 몸은 치욕을 주기 쉽고, 옷 몇 겹만 벗겨내도 효과가 대단하다. 인간은 왜 옷을 입어야 하는가? 그것은 필요할 때 벗기기 위함이다. 멀쩡히 있는 성기를 잘라내는 것과 뚫려있는 구멍을 헤집어질 때의 모욕감은 비교가 가능한가? 최악은 어디까지가 최악이고 차악은 어디까지가 차악인가. 구멍이 있는 몸으로 태어나서 옷이 찢기면 침입당할 수 있는 치부를 가지고 나는 얼마만큼 용감해질 수 있을까.
이 글을 쓰러 간다.
곧장 쓰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