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인 Jun 20. 2022

착한 척이라도 하면서 살아야지

이 소란한 시대에.

천안 독립기념관, 조선 총독부 철거부재 전시 공원.


​​​

시험기간 한가운데다. 이 짓만 끝나면 방학이라지만 바쁨이 썩 달갑지 않다. 눈을 감았다 뜨면 시험이 끝난 날 저녁의 침대 위였으면 좋겠다.

정신머리가 없는 중에도 강사 교육은 꾸준히 참석했다. 지난번에 온 초청강사는 지원 프로그램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로, 나의 강의 후기는 떨떠름하다.

그 사람은 남성 학우에게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예시를 들면서 자신게는 아내와 아이가 있으니 걱정 말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 소재로 객석에서 웃음을 끌어낸다. 앉아있는 성소수자는 기분이 언짢다.

강의 말미에 격언이나 명언을 넣을 때는 가급적이면 아프리카나 트남 같은 나라보다 유럽 쪽 '있어 보이는' 나라의 속담을 사용하라는 말을 했다. 자기는 사대주의, 뭐 그런 건 아닌데 그래도 강의적 측면에서 한번 짚어주는 거라고 주변 눈치를 본다.(눈치를 볼 만큼은 영리한 사람이다) 누가 봐도 사대주의적 발언을 하면서, 숏컷을 하고 화장을 하지 않은 비건 참여자의 이름을  집어 '혹시 00님, 불편한 거 아니시죠?' 하고 물어본다. 정작 페미니스트는 여기 이 옆자리에 앉아있는데. 00님은 괜찮을지 몰라도 나는 불편했다. 아주 불편했다. 내가 남자였다면 그냥 웃고 넘겼을까. 내가 성소수자가 아니었다면 흔하디 흔한 유머 코드였겠지.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이런 발언들은 떨떠름하다. 돌부리처럼 마음에 계속 걸린다.

학교 강의도 마찬가지다. 원론 교수의 입에서 '남자는 예쁜 거 다 필요 없어. 돈 관리는 잘하는 여자를 만나서 결혼해야 돼.'라는 말이 일장연설처럼 나오고, 개론 교수는 '이런 직장은 직급 높은 여자들이 많아. 직장이 좋으니까 여자들이 안 나가떨어지고 애 낳고도 육아 휴직 써서 돌아오는 거지. 그래서 티오가 잘 안나.' '여자는 결혼하지, 애 낳지, 그전까지 일하려면 이 정도 직장도 적당하다.' 류의 발언.

일터 밖의 세상은 굉장히 무심하고 차별적인 곳이었다. 바에서 일을 할 때는 그 손님만 유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넘겼고, 퇴사한 후로는 누구를 만날 일이 없는데 여러 사람이 오글오글 모여 앉아있는 강의실, 누군가 열변을 토하는 세미나, 공통 주제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모임 곳곳에 참여하면서 까마득한 거리감이 든다. 이렇게 날 선 곳에 (나보다 더) 소수자이자 약자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정치적인 옮음, 대중적인 옮음이 이 세상에는 부족하다.



정권이 바뀌었다. 고작 한 달인데 기조가 심상치 않다. 동생이 해마다 참여했던 청년사업은 예산을 칼같이 제한하며 열정 페이식의 진행을 요구하고, 이맘때쯤 열리던 청년지원사업들도 자취를 감췄다. 잘 내고 있던 전기 수도요금이 오를 거라는 뉴스를 인터넷에서 보았다. 작년 겨울부터 운전대를 잡은 초보운전자에게 기름값은 연일 최고치를 보여준다. 퀴어퍼레이드는 허락해 줬지만 노출은 하지 말란다. 낙태법 개정안 입법 세미나 포스터도 봤다. 아니, 국가가 퀴어에게 억지로 옷을 입히고 여성의 출산을 강제하다니? 2022년에?

글쓰기 모임에서는 퀴어, 페미니즘 이야기를 '한물 간' 유행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 몸과 일치하는 주제들이 남자들의 SF문학 섹스 로봇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 같아 분이 찬다. 이러한 세상에, 6월의 한가운데에

변절 없이 독립운동을 하고 끊임없이 민주주의를 외쳤던 사람들에게 존경심이 든다.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데 그럴 수 있지. 미래에서 누군가 튀어나와 예언을 해주지 않고서야, 점쟁이가 기필코 그런 날이 오리라고 확언해주지 않고서야 당장의 깜깜함에 나가떨어질 것만 같은데 어떻게. <어린이라는 세계>에서는 1960년 419 혁명에 초등학생들도 나가 시위를 했다고 한다. 영화 <동주>를 보니 그가 죽었던 스물여덟이 너무나 어렸다. 참 어렸다.

이번 주 시험이 끝나면 흰소리를 했던 교수들은 당분간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강의평가에 구구절절 써놓은 내 불편함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좌절스러웠던 것은, 개인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교수들과 강사의 부주의함도 있지만 그에 동조하며 와르르 웃어젖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강의실 밖을 떠나 대한민국의 반을, 전체를, 인간 자체가 될까 봐. '그런 사람'이 아닌 사람을 단정 짓고, 손가락질하며, 개그에서나 쓰이는 무언가가 될까 봐.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은 웃을 것이 아니다. 모든 인간을 금발의 백인 남성처럼 봐야 한다. 모든 인간, 세상에 모든 인간을.(가능하다면 동물도.)

그렇게만 서로를 대해도 원래보다 나은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착하지 않다면 착한 척이라도 하는 게 맞다. 착한 척도 없는 세상이야말로 무시무시한 곳이다.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그나마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보이는 것. 그 정도로도 불편함은 줄어든다.


사람이 보다 나은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역시, 착한 척이다.

그냥 척으로도 충분한, 바름.





매거진의 이전글 글을 쓰러 간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