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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Apr 04. 2023

Washington 09. 애인 실격

너 나한테 왜 그래


그냥 따로 놀다가 시간 남으면 보자고 했잖아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본문 중



*

아니 도대체 왜.

대체 뭐야.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바론이 워싱턴디씨에 도착했을 때 나는 우울했다. 테오도르에게 소심한 고백을 했다가 답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좁쌀보다 조그맣게 느껴졌다. 아무하고도 이야기를 나누고싶지가 않았다. 그리고 바론은 몸이 아팠다. 비행기를 타기 하루 전에 갑자기 안 좋아졌다고 했다. 몸살기운이 있는 채로 워싱턴디씨에 온 바론과 거절당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바닥을 친 나. 여러모로 좋을 것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바론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즐거운 척을 하기에도 힘에 부쳤다.

나란히 앉아서 칵테일을 먹다가 바론에게 테오도르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나, 너무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워싱턴에 왔어. 그 사람이 보고 싶어서 그냥 왔어. 바론이 고개를 끄덕인다. 너라면 여기까지 온 데에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았어.

나는 테오가 보고 싶어서 워싱턴에 왔다. 바론은 뭘 참을 수 없어서 왔을까.


바론이 저녁을 사겠다고 하기에 근사한 스테이크집에서 만났다. 번쩍거리는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으니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었다.

서로 둘러본 관광지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바론이 뭔가를 내밀었다. 국회도서관 기념품이었다. 내가 가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나는 책 없이 못 살아’라는 문장이 적힌 티셔츠.

세상에, 잠깐 스쳐갔던 그 말을 어떻게 기억하고.

울적했던 것을 잊고 활짝 웃어버렸다. 바론의 따뜻함과 섬세함이 좋았다. 그러고 보니 바론은 늘 내가 하는 말을 기억해주곤 했다. 전주에 좋아하는 바가 있다는 말, 밀크초콜릿보다 화이트 초콜릿을 좋아한다는 말. 비 오는 날에 잘 나가지 않는다는 자질구레한 것까지. 바론의 깜짝선물 덕분에 식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행복해졌다. 바론은 정말 좋은 친구다.

스테이크는 황홀한 맛이었다. 바론이 고르고 골라서 결정한 레스토랑이라더니 과연 흠잡을 데가 없다. 한국에서도 부담스러워서 못 시켰던 립 아이를 오물오물 씹어 삼켰다. 밥을 먹는 내내 바론에게 테오도르에 대해 징징댔다. 반은 고민상담이고, 반은 투정이었다. 내편을 좀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꿋꿋하게 그 사람과는 잘 될 일이 없어 보인다고 말한다. 차분하고 현명한 바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바론. 어쩌다 그 얘기가 나왔더라. 어쩌다가.


“난 내가 멋지다고 생각해. 걔를 보러 여기까지 왔잖아. 멍청한 짓이었지만 되돌리고 싶지는 않아. 내가 보고 싶었던 눈동자를 원 없이 봤으니까. 후회도 없어.”


내 푸념을 듣고 있던 바론이 말했다.


“너랑 나는 참 닮았다. 나도 누군가를 보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오.

저게 무슨 뜻이지.


눈앞이 깜깜해졌다. 앉아있는 자리가 가시방석이 됐다. 왜 저런 말을 하지? 날 좋아하는 건가? 친구 이상으로? 설마 그럴리가. 자리를 박차고 도망가고 싶었다. 테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저 친밀한 사람으로만 생각하던 내가 하루아침에 여기까지 날아와서, 그를 좋아하게 되어서? 그 모습이 우스울 만큼 훤히 보여 지금의 나처럼 당황스러웠을까? 테오도르는 정말 일이 바빴던 걸까 아니면 나와 거리를 두고 싶었던 걸까. 바론이 내게 그렇듯 아무렇지 않은 척 매일 저녁을 같이 보내는게 그에게 고역이었으면 어쩌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자신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고 말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으면. 받을 수 없는 감정에 대한 거부감이 재해처럼 몰려왔다. 이게 뭐야. 도대체 뭐냐고. 내가 너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이런 기분이 들 수가 있어.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이렇게 껄끄러울 수가 있는 거냐고.


술을 권하는 바론을 두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호텔에 돌아왔다. 샤워를 끝내고 나오니 핸드폰이 연락이 빽빽했다. 싱가포르에서부터 나를 쫓아다니던 남자애가 구구절절 보내온 구애 문자다. 하필 이런 날. 꼭 이렇게 머릿속이 어지러운 날. 얼굴을 못 본 지 2년이 넘었는데 지치지도 않고 연락을 해온다. 친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지겹도록 말해도 못들은척을 한다. 나랑 살려고 한국 이민을 준비중이라는 헛소리가 메신저 창에 가득했다. 환장하겠구만. 머리가 쪼개질 것 같다. 갑자기 다들 왜 이러는 거야.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결국 또 애꿎은 E에게 날카롭게 말하고 말았다.


나 하나 때문에 한국을 온다고?

리스크가 너무 커. 하지 마.

현명하게 생각해. 난 추천 안 해.

그리고 여보라고 부르지 마. 우리가 결혼한 사이도 아니고. 듣고 싶지 않아.


마음이 좋지 않다. 어쩌면 우리는 계속 서로 속이면서 소통해 왔는지도 모른다. 너를 좋아하지 않는 척, 네가 나를 좋아하는 것을 모르는 척, 이미 우리가 사랑에 빠진 척. 유예된 진실은 언젠가는 상처가 될 수밖에 없구나. 이 정도는 아프지도 않고 거슬리지도 않는다고 외면했다가 나중에 눈덩이처럼 불어난 몰골로 마주해 버린다. 께름칙하고 걸쭉한 감정의 응어리로. 정말이지 산뜻하고 명랑한 불신이었다. 우리에게 아무 역경도 없을 거라는 믿음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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