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모욕하는 걸까?
글을 쓸 때 픽션은 더 겁이 나지만 논픽션은 더 어렵다. 논픽션은 현실에 기반하고 있고 오늘날 느껴지는 현실은 압도적으로, 회로가 터질 정도로 거대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반면 픽션은 무에서 나온다. 그런데, 말하자면, 사실 두 장르 모두 겁이 난다. 둘 다 심연 위에 걸친 줄을 타는 느낌이다. 그런데 그 심연이 다르다. 픽션의 심연은 침묵, 허무다. 반면 논픽션의 심연은 '완전 소음', 즉 모든 개별 사물과 경험의 들끓는 잡음, 그리고 무엇을 선택적으로 돌보고 표현하고 연결할지 어떻게, 왜 할지 등에 대한 무한한 선택의 완전한 자유다.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 <결정자가 된다는 것>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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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나를 홀라당 까뒤집고 다니나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내가 까보일 게 나밖에 없는 걸 어떡해. 나 좋자고 쓰는 글인데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거짓말을 해? 그러다 보니 남 보기 부끄러운 일기들만 늘어간다. 그걸 또 좋다고 여러 번 읽는다. 최근의 나는,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좋기 때문에. 아무리 낯간지럽대도 내가 적어온 기록이 있어 다행스럽다. 읽을 때마다 혀 안쪽이 간질간질해진다. 미국에 갔다 오길 잘했다. 글로 써두길 잘했다.
오늘은 회사에서 내년에 있을 아시아 최대 프로젝트를 앞두고 글로벌 회의가 있었다. 팀장님이 본사에서 참여 중이고, 나와 매니저는 회의실에서 줌으로 들었다. 두 시간 내내 각양 각국의 영어발음을 알아듣느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더니 진이 빠진다. 스페인 출신 전무가 나에게 윙크를 보내며 ‘신입의 둘째 날 치고 혹독하지?’하고 말했다. 그 사람도 금색 머리에 파란 눈이다. 다만 테오도르보다 훨씬 밝은 하늘색.
거짓말쟁이들. 면접 때는 영어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놓고 행동 강령이며 지침 서류를 죄다 영어로 적어놓았다. 첫날부터 지금까지 언어 때문에 두 배는 고단하다. 그래도 안도하는 것은, 분명히 내 영어는 지금보다 나아질 것이고 원활해질 것이며 그것은 언젠가 테오를 만날 때 도움이 될 거라는 것이다. 답답함 없이 말하고 싶다. 물 흘러가듯이 한국어로 하고 있던 생각들을 영어로 번역하고 싶다. 인도와 러시아, 아일랜드의 억센 억양을 거리낌 없이 들어 넘기고 싶다. 회사 서류에 두 번 이상 나왔던 단어들을 복기한다. Consumption, Relevant, Inclusiveness, Kinship. 영어를 와구와구 씹어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모두 내 안에 들어온 것을 확신할 수 있게.
영어를 앞에 두고 곡소리를 내다가도 미국에서 보냈던 마지막밤을 생각하면 다 괜찮아진다. 그날 밤 있었던 일을 토씨하나 빼지 않고 적어버리고 싶지만 어쩌다가 이 문장을 읽어버릴 이타적이고 선량한 사람들의 평온한 하루를 더럽히고 싶지 않아서 참는 중이다.
이전에 들었던 다른 글쓰기 강의에서 신나게 내가 했던 섹스에 대한 글을 썼다가 ‘자기 선이라는 걸 남에게 강요할 순 없지만 독자가 읽고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다는 건 고민을 좀 하시면 좋겠어요 ‘라는 댓글이 달렸다. 읽는 사람 기분도 생각하는 것, 그건 내가 제일 못하는 것 중 하나다. 읽는 사람의 의지로 취향에 맞지 않을 때 글을 넘겨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나는 딱히 수치스럽지도 않고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꽤 마음에 들어서 올린 거였다. 여하튼 논픽션의 세계는 넓고도 눈치 보이는구나. 그 후로 직접적인 묘사는 자제하려고 신경을 쓰고 있다. 이렇게 하다가도 언젠가 또 쓰게 될지 모르지만. 옆집 아줌마에게 주접을 부리듯이, 친구에게 타령을 하듯이 말이다. 하, 그날 진짜로 좋았는데, 너도 그 얘길 들어야 하는데, 하고. 이렇게 좋은 거면 글로 남겨놓기라도 해야 남는 장사 아닌가. 논픽션밖에 쓰지 못하는 인간이라 논픽션이 어렵다. 머릿속으로만 그리기에는 너무 아쉬운 밤이었다. 나를 홀라당 드러내고 다니는 것도 쾌감이 있다. 벌거벗고 돌아다니는 꿈을 꾸면 처음엔 당황스럽지만 곧 익숙해지는 것처럼, 빠르게 찾아오는 체념과 해방감 같은 것이 있다는 말이다. 나는 앞으로도 막무가내로 논픽션을 쓰고 누군가를 불쾌하게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때처럼 대댓글로 달아놔야지.
모욕감을 느끼게 해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