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사람이 앉아서 일 할 수 있단 말이에요?
인식 대상에 대해 말하기 전에, 말하는 자신에 대한 사회적 신원, 위치, 체현을 밝혀야 한다. 다시 강조하면, 본디 말하기, 글쓰기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 쓰는 것이다.
정희진,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 머리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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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새벽에 귀국하고 오늘 아침에 첫 출근을 했다. 이게 웬걸, 별세계가 따로 없다. 로비에 설치된 바에는 빵이며 삶은 달걀, 각종 주스와 술이 상비되어 있다. 내 이름을 들은 담당자가 개인 피씨를 세팅해 준다. 노트북은 자유롭게 출반입이 가능하다. 전용 키보드와 마우스는 새 상품이다. 점심은 열한 시 반부터 열두 시 반 사이에 아무 때나 먹으러 나갔다가 들어오면 되고, 내일모레엔 회사가 제공하는 웰컴 런치가 있다. 여기저기에서 받아본 적 없는 것들이 퐁퐁 샘솟는다. 왜 이렇게 주기만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자리에 앉자마자 사원증과 명함을 받았다. 난생처음 보는 직급이 적힌 명함이 낯설다. 같이 일하게 될 상사와 직원들은 좋은 사람들처럼 보인다. 티브이에서 보던 커리어우먼들처럼 세련되고 멋지게 차려입었다. 또각또각 힐소리를 내며 복도를 누빈다. 나는 어색하게 그 사이에 끼어서 목폴라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어쩐지 휘황찬란한 회사에 들어와 버려서, 무얼 할지 몰라 눈알만 굴린다. 지금까지는 바 안에 들어가서 오픈은 어떻게 하면 돼요? 포스는 어떻게 만지면 돼요? 하면 됐는데 여기는 프린트를 할 때도 사원증을 찍어야 한다. 내 이름이 박힌 메일주소와 비밀번호가 마냥 신기하다. 내 회사. 내 직급. 내 자리. 회사가 나에게 주는 것들. 노동자의 날에, 토요일과 일요일에, 빨간색 공휴일에 쉴 수 있는 권리. 신기한 일이다. 이제는 남들이 쉬는 날에 나도 쉰다.
퇴근 직전에 선물이라며 출시예정인 위스키 두병을 받았다. 내 담당 브랜드인데도 공으로 얻은 술이 얼떨떨하다. 사내 주류샵에서는 어지간한 술들을 직원에게 공짜나 다름없이 판다. 그러고도 또 술을 준다. 마르지 않는 샘물에, 황금색의 땅에 들어온 것 같다. 회사의 모든 복지는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난다. 내가 해야 할 모든 일도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난다. 바 안에 있을 때와 똑같은 문장인데도 느낌이 다르다. 나는 더 이상 서서 일할 필요가 없다. 값비싼 테일러 정장도 레몬즙 튈 걱정 없이 마음껏 입을 수 있다. 힐도 신고 멋도 부린다. 북적이는 점심시간의 인파에 끼어 밥을 먹는다. 수혈이라도 하는 것처럼 커피를 사 마신다. 그 모든 걸 오늘 처음 해봤다. 회사에서 일하는 사원의 기분을 한껏 즐겼다.
새롭게 얻은 나 자신의 모습이 나쁘지 않다. 작가 정희진은 인식 대상에 대해 말하기 전에 말하는 자신에 대한 사회적 신원, 위치, 체현을 밝혀야 한다고 말한다. 내 모습을 이렇게 적어두고 시작하면 좀 정돈된 말하기와 글쓰기가 나올까, 아니면 회사가 나에게 준 법인카드를 당연히 여기는 재수 없는 직장인이 될까. 잘 모르겠다. 갑자기 내 손안에 우르르 떨어진 것들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도적들이 숨겨놓은 금화더미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기분이다. 그래도 입사 전이나 입사 후나 마법 램프에 빌고 싶은 소원은 변함이 없다.
미국에 가게 해 주세요. 내 위에 있던 그 예쁜 얼굴을 다시 보게 해주세요.
내 생각에, 이 거창한 회사를 잘 뒤져보면 어딘가에 숨어있는 램프의 요정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다. 내 소원을 이뤄줄 수 있는, 나를 미국에 보내줄 수 있는 램프의 요정. 열심히 할 일만 남았다. 끈질기게 붙어서 미국에 보내줄 때까지 떼를 써야겠다. 불순해도 어쩔 수 없다. 미카엘 대표님, 나는 미국에 가고 싶다니깐요. 가면 더 대단한 직원이 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열심히 할 일만 남았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램프의 요정이 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