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때문에 온 워싱턴 여행, 해피엔딩.
“우주가 무수히 많은 곳에서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아름다운 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그러면서도 우주는 활기차고 사무적이다.”
메리 올리버, <완벽한 날들>
*
창문 밖에 흐드러지는 별이 떠있다. 인천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보는 밤하늘이다. 열두 시간 비행 중에 일곱 시간 정도를 내리 자고 일어났다. 이번에도 옆자리가 비어 은근슬쩍 창가를 차지할 수 있었다. 다리를 쭉 뻗으니 잠도 잘 온다. 하늘을 나는 쇳덩이의 은은한 진동을 느끼며 실려있는 것은 조용하고 나른하다. 수면등만 켜놓은 세상. 잠자는 숨소리만 들리는 세상.
꿈이었나. 꿈이었을 수도 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너무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초현실적인 일이었다. 내가 어떻게 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을 수 있었지? 넓은 맨가슴에 기대어 있을 수 있었지? 네 팔에 꽉 안겨있던 게 내가 맞나. 정말 나인가?
사랑에 빠졌던 순간이 기억난다. 지난겨울 테오가 한국에 왔을 때, 지인을 만나려고 돌아다니다가 택시를 잡아탔다. 십이월 중순이라 날이 추웠다. 나란히 뒷좌석에 앉아서 시답지 않은 얘기를 하며 낄낄 웃었다. 설원이 펼쳐진 테오의 고향마을 풍경이나 상류층들 배경의 미국 드라마, 텍사스를 여행할 때는 픽업트럭을 빌려야 한다는 그런 이야기. 그러다 창밖을 봤는데 눈이 내리고 있었다. 쌓이지도 않을 싸락눈이 펄펄 내렸다. 원래도 눈을 좋아하지만 택시 안에서 보는 게 아까울 정도로 예쁜 광경이었다.
테오, 테오 창밖을 봐. 눈이 내린다.
첫눈이야.
사 년 만에 처음으로 남자랑 첫눈을 맞는데 옆에 있는 게 우리 왕자님이네.
나는 테오도르를 프린스라고 불렀다. 수줍음이 많고, 눈동자가 예쁘고, 귀엽고, 어려서. 말 그대로 왕자님 같아서 그렇게 불렀다. 사실 저 날은 첫눈도 아니었고, 처음 눈을 본 날도 아니었다. 그냥 그가 옆에 앉아있을 때 장난을 걸고 싶었다. 어쩌면 손님과 단 둘이 택시에 앉아있는 게 어색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창밖에 눈을 보던 테오가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파란 눈을 두어 번 깜박이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딱 한마디를 했다.
“운명인가 봐.”
그다음에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부터였다. 새로 들어온 가게에 앉아 아이리시 커피와 카페라테를 마시며 테이블 위에 놓인 손을 한번 잡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던 게. 나란히 앉은 옆얼굴의 뽀얀 피부와 오뚝한 콧대를 보며 이렇게 예뻤나, 이렇게 잘생겼었나 하고 다시 느껴버렸던 게. 테오도르의 뒤에 있는 통창 너머로 눈발이 흩날리는 한국 골목이, 낡은 간판들이 보였다. 빛을 역광으로 받아도 눈동자에서 반짝반짝 빛이 난다. 당황스러웠다. 사람 눈이 어떻게 이런 색깔일 수가. 태평양 바다를 얼려 만든 얼음 같은 색깔일 수가. 그 후로 사정없이 그가 보고 싶어 졌다. 눈이 내리는 것만 보면 그 눈동자가 생각났다. 테오가 미국으로 돌아가고 한 번의 큰 눈이 내렸고, 나는 새하얀 창밖을 비디오로 찍어서 보냈다.
네 생각이 난다.
테오도르는 미네소타의 설원을 답신으로 주었다. 하늘 빼고 전부 하얀 빽빽하고 성긴 눈밭. 그리고 그의 그림자.
아침에 등뒤에서 나를 꽉 끌어안은 테오가 귓가에 대고 물었다. 웃음기가 가득 배인 목소리였다.
해인. 그날 택시에서 봤던 눈, 기억해?
이제 그는 나를 한국이름으로 부른다. 개명한 이름보다, 영어이름보다 친할아버지가 지어준 저 이름이 더 예쁘다고 즐거워했다. 육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테오도르에게 나는 한이었다. 위스키 바의 바텐더, 한. 이제 나는 해인이다. 고등학교 친구들이 나를 부르듯이, 친할아버지가 다정하게 나를 불러주었듯이. 서툰 발음으로 꼬박꼬박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게 사랑스럽고 부끄럽다. 꽤 경이로운 밤하늘이다. 경이로운 우주.
아마 그 눈이 아니었으면 난 여기 없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