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속 증류기 1
“문명은 증류와 함께 시작된다.”
윌리엄 포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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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참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초여름의 더운 바람이 솔솔 부는 날씨는 사람을 두근거리게 한다. 집안에 있는 창이란 창을 죄다 열어서 환기를 시키고, 그것도 부족해서 도서관 책반납을 핑계로 굴러 나왔다. 기분이 좋아지는 날씨다. 살아있는 게 뿌듯한, 숨 쉬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날씨.
업무 때문에 술책이란 술책을 다 뒤져서 읽었더니 이제는 뇌수까지 증류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든다. 증류주를 뜻하는 스피릿이라는 단어가 물질의 정수이자 영혼이라는 영어단어와 같은 모양이라 그런 건지. 어제 ‘너는 누구야?’라고 계속 물어대는 일본 공포영화를 봐서 그런 건지.
그러고 보니 어느 한때 유명했던 책도 있었다. 여자를 죽이고 체취를 뽑아서 황홀한 향수를 만두는 것을 즐겼던 남자의 이야기. 그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 알코올은 효모에게 먹이로 줄 당분과 전분이 있어야 하는데, 철분과 지방이 가득한 인간을 증류하면 뭐가 만들어질까.
증류기는 원래 향수와 약을 만드는데 쓰였던 도구다. 연금술의 시초가 된 연단술은 진시황을 위한 불로장생 연구에서 비롯되었고, 납을 은으로 바꾸지 못해 침략자들의 손을 타고 서쪽으로 서쪽으로 뻗어나갔다. 인간의 문명은 참 근사하면서도 편리한 소재다. 누구는 문명이 농경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누구는 농경이 맥주 때문에 시작되었다고도 말한다. 이제는 세기를 훌쩍 뛰어넘어 증류까지 왔다. 못해도 14세기, 어쩌면 그보다 전.
문명이 눈부신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일지 모른다. 시카고의 화려한 재즈바와 개츠비의 위대함도, 마야와 아즈텍의 건축과 유물들도, 사막 한가운데의 피라미드도. 지금에 와서는 붙잡을 수 없는 것들에게 약간의 동경을 담아 문명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준 거 아닐까. 이것도 문명, 저것도 문명, 오늘도 문명.
뇌수를 증류하는 생각을 했더니 속이 좋지 않다. 약 한 시간 동안의 외출로 이 그림 같은 날을 충분히 즐겼으니, 남은 휴일은 또 널어놓은 건어물처럼 보내야겠다. 그루누이가 만들어낸 것은 소설에서 묘사한 것만큼 매혹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썩은 계란 냄새가 나면 났지. 인간에게서는 좋은 향기가 나지 않는다. 좋은 냄새는 바람과 흙과 증류기를 만드는 구리에게서 나는 냄새다. 보글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