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속 증류기 2
술을 술이라 부르는 이유에는 우리 조상의 지혜로움이 담겨 있다. 술은 원래 ‘물 모양을 가진 불의 성격의 물체’를 뜻하는 ‘수불’에서 시작했다가 세월과 함께 단순화되어 ‘술’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정헌배, <정헌배 교수의 술나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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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를 다시 봤다. 마음이 편치 않은 출근길, 영화에서 증류기술과 향미를 얼마나 잘 다루었는지 곱씹는 중이다. 옛날옛적 향수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던 초기의 증류기가 고스란히 나온다. 장미를 넣고, 바글바글 끓이면 몇 방울이 간신히 나오는 영혼의 물. 아마추어인 나로서는 정확히 어떤 물질이 모인 건지 모르겠지만, 장미증기가 가진 것 중 가장 가볍고도 붙잡기 힘든 것이 증류기 관을 따라 나왔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인간을 통에 넣어 증류해 봤자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그루누이는 다른 방법을 찾는데, 이것 역시 일종의 담금주와 같은 기술이다. 인퓨징, 즉 향이 스며들게 하는 기법인데 오래 담가두어 액체 전체에 향미 성분을 배게 만드는 것이다. 바탕이 되는 술은 주로 무색무취의 보드카가 사용된다. 꽃잎향을 추출하는 용도의 유리통에 사람을 넣어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미라를 만들 때처럼 피와 체액을 몽땅 빼서 집어넣었으면 모를까 시체를 고대로 인퓨징 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닐 텐데. 그루누이가 영화 내내 집착하던 것은 사람의 피부와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이 아니었나? 통째로 담가두기만 하는 것만으로는 피와 배설물, 가죽의 비린맛밖에 나지 않을 텐데. 그리고 다음에 이어진 행동에서 곧장 납득했다. 사람의 맨 피부에 기름을 바르고 그걸 걷어내어 향수 재료로 쓰는 것. 내장이 아니라 껍질의 향만 긁어오는 거라면 그 향이 고운 것도 이해가 가지.
그 외에도 헤드(head)와 하트(heart), 베이스(base)라는 향수제작의 삼단계도 인상적이다. 위스키도 맛만큼이나 향이 중요하기 때문에 첫맛, 중간맛, 끝맛으로 나누어 테이스팅을 하라고 말하기 때문에. 색을 보고, 향을 맡고, 입안에 향기를 듬뿍 머금어 각각의 단계 사이를 음미하라고 말한다. 향수 전문가가 향을 연구하며 베르가못, 아마씨, 정향, 스타아니스 등의 재료등을 언급하는 것도 위스키 테이스팅에 사용하는 플레이버 노트와 비슷하다.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도 바텐더를 하고 있었을 텐데 공부를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보이는 게 달라지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그저께는 브리짓존스의 일기를 보았는데 앱솔루트 오리지널 보드카가 나왔다. 강의에 써먹어야지.) 계속 공부하고 시야를 넓혀야 한다. 같은걸 보아도 내가 바뀐다. 세상이 다 바뀌어도 나 혼자만 그대로일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낯설었는데 이렇게 보면 계속 변해가는 건 결국 나구나. 김광석 가수의 노래처럼.
지금은 증류기에 직접 열을 가하지 않고도 가동하는 방법이 있을 만큼 기술이 좋아졌지만, 예전의 증류주는 말 그대로 뿌연 에탄올 증기와 액체가 팔팔 끓는 실험실 같은 풍경이었을 것이다. 증류가 끝나면 70도 가까운 도수를 내는 알코올이 나오기 때문에 증류소 근방에 소방서가 있는 경우도 흔했다. 약간의 불씨에도 활활 타올랐을 그때의 술. 거기에 대고 물 모양을 가진 불의 성격의 물체라는 개념을 갖다 붙인 조상들의 위대함을 느낀다. 이보다 정확할 수가 없는 단어. 물보다 차갑고 불보다 뜨거운, 둘 사이를 넘나드는 물질이 바로 술이다.
구리며 유리처럼 온갖 것을 증류기에 넣고 끓여대는 그루누이를 보면서 나는 이 영화가 향수에 대한 주제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향수는 병째로 들어서 벌컥벌컥 들이켤 일이 없으니까. 영화 속에 나온 것처럼 우아하게 손수건에 뿌려 냄새분자를 퍼뜨리는 용도니까. 향수가 어떤지 모르겠지만 집에서 증류주를 만들겠다고 술을 끓여 먹는 것은 다분히 위험한 일이다. 증류해서 나오는 알코올 중에서 그나마 먹을 수 있는 부분은 ‘중류’라고 하는 증류과정의 중간 부분이다. 가장 먼저 관을 타고 떨어지는 성분이 바로 자동차 워셔액에 사용되는 메탄올인데, 한잔이면 눈이 멀고 석 잔이면 이미 저승길을 건널 만큼 유독하다. 그 독극물을 똑 잘라내고, 후반부에 나오는 떨떠름한 퓨젤오일과 프로판올까지 걸러내야 한다. 그루누이는 운이 좋다. 파리의 거리에서 조향사가 아니라 증류업자를 만났다면 사람을 죽일 필요도 없이 스스로 먼저 죽었을 텐데. 어떤 이야기는 시작 필요도 없지 않은가. 가장 비밀스러운 열세 번째 재료가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의 머릿내음과 살냄새라니 정말 악취 나는 결말이다.
1700년대 파리의 낡은 알렘빅을 보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해야겠다. 영화 속에서 그 시대의 증류 과정을 보는 건 재미있는 경험이니까. 하지만 허울 좋게 탐미주의 껍데기를 쓰고 있는 구시대적인 주제선택은 그렇게 유쾌하지 않다. 다시 봐도 의아한 설정이다. 사람에게서 어떻게 향기가 나지? 작가는 우리가 달고 사는 내장이 어디에 담겨있는지를 까맣게 잊고 글을 쓴 걸까. 목덜미가 예쁜 여자는 트름도 방귀도 대변도 없는 것처럼 묘사해 놨다. 역시, 제대로 된 인간 냄새가 나려면 척수액까지 골고루 향이 배도록 냉침을 해야겠다. 알코올에 퉁퉁 불어 구멍마다 새어 나오는 이물질이 녹아들면 그제야 그 향기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킁킁.
인간 냄새가 나. 오물 같은 냄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