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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Sep 18. 2023

Bar-16. 꿈에서 악마를 만났다

그러라고 꾼 꿈이 아닐 텐데?

누구는 악몽같은건 신경도 쓰지 않는다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어느 날 저녁, 한 유명한 브랜디 생산자가 무서운 꿈을 꿨다고 한다. 악마가 그의 영혼을 뽑아내려고 그를 두 번 삶으려 하는 무서운 꿈이었다. 잠에서 깬 후 그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독한 브랜디 한 잔이 필요하기도 했겠지만 그보다 뭔가가 퍼뜩 떠올랐다. 브랜디를 두 번 증류시켜서 그 영혼을 뽑아내보자는 생각이었다.


조엘 해리슨, 닐 리들리 <스피릿>



*

다음 역은 신도림. 신도림 역입니다.


출근길에 술 책을 읽다가 재미있는 걸 봤다. 꿈에서 악마를 만난 술장수의 이야기.


최근에 비슷한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인간을 증류기에 넣어서 팔팔 끓여도 걸쩍지근한 냄새가 나는 액체 몇 방울밖에 되지 않을 거라고. 세상만사가 다 돈이라지만, 브랜디는 특히나 자본가의 마음으로 완성되었다. 여러 지역에 와인을 팔아 쏠쏠한 수익을 올렸던 상인들이 장거리 운반에서 상하거나 버려지는 상품의 양을 줄이려고 고안해 낸 방법이 바로 브랜디의 시초다. 와인이 상하기 전에 냅다 증류한 다음에 현지에 도착해서 물에 섞어주는 것이다. 미각적이지도 않고, 전문적이지도 않다. 탄생비화가 거칠기 짝이 없다 보니 옛날의 브랜디는 1회 증류가 전부였다. 그런데 도대체 언제부터 2번씩 증류를 하면서 품질에 신경을 썼느냐 했더니 이런 가위눌린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악마가 브랜디업자를 잡아다 두 번 삶았다. 그의 영혼을 가져가려고. 보글보글.


매번 와인을 팔팔 끓여대던 장사꾼이 꿈속에서 자기가 군불에 덥혀지는 입장이 되다니. 통쾌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은 브랜디용 포도와 와인용 포도 품종을 구분하여 만들지만 그때에는 말 그대로 판매용 와인을 대충 가져다 증류했을 것이다. 관짝이나 다름없는 구리 증류기에 콸콸 부어졌을 와인들에게는 브랜디업자가 악마나 다름이 없었겠지. 정말로 세상 만물에 영혼이 있다면 인간이야말로 그것들을 알약처럼 뽑아먹는 역할이다. 포도주의 영혼, 컴퓨터의 영혼, 고추와 깻잎의 영혼, 향수와 디퓨저의 영혼. 악마가 호시탐탐 노릴 만도 하다. 이런 탐욕스러운 생물의 영혼을 뽑아내려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을 삶아서 죽죽 사골국물을 내야 한단다. 뼈와 살이 잘 발리고 한 줌의 밍밍함도 남지 않게 센 불로 거침없이 끓여주는 것이다. 소힘줄처럼 질긴 인간의 영혼을 악마가 악착같이 얻어내는 방법이 2회 증류라니. 그것도 어쩌다가 브랜디업자에게 유출되어서 애꿎은 포도주의 마지막 영혼 한 방울까지 탈탈 털리게 되었다.

꿈속에서 그렇게 호되게 당하고도 반성 없이 오, 내가 두 번 삶아진 것처럼 브랜디도 두 번 증류해 볼까 하는 깨달음을 얻은 업자도 웃기다. 악마의 방법을 고스란히 따라 하는 것은 역시 인간도 다른 것들에게 악마와 다름없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증류되어 영혼이 쪽쪽 빨린 와인은 또 어딘가로 팔려가 포도찌꺼기를 증류해 만드는 그라파가 되어 남은 영혼마저도 도둑맞게 될까. 아니면 브랜디업자가 키우는 무밭에 뿌려서 식물이 자라는 비료로 쓰이게 될까. 뭐가 되었든 모든 걸 빼앗긴 와인은 가루도 남지 않고 분해될 것이다. 유기물의 영혼을 착취하면서 재사용 불가능한 일회용품을 뿜어내는 것은 인간인데 왜 우리의 영혼은 아무도 빼앗지 않을까. 인간은 무언가를 빼앗은 채로 돌려주지 않고 다시 빼앗는다. 다른 것의 영혼을 게걸스럽게 목구멍으로 넘기며 살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진다.

인간은 뭘까. 인간과 악마의 차이는.



이번 역은 종각. 종각 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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