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인 Aug 29. 2023

Washington 14. 내가 왜 네 햇살이야?

바론이 한국에 왔다

또 워싱턴 디씨 이야기라니!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말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말이란 결코 정확할 수 없으며 언제나 뭔가 빠뜨리기 때문이다. 현실에는 너무 많은 단편들이 있고, 관점들이 있고, 반목들이 있으며, 뉘앙스가 있다. 이런 의미도 저런 의미도 될 수 있는 몸짓들이 너무 많고, 말로는 절대로 완벽하게 표현할 길 없는 형상들도 너무 많으며, 허공에 떠다니거나 혀끝에 감도는 향도 수없이 많고, 어중간한 색채들도 한없이 많다.


마거릿 애트우드, <시녀 이야기> 중




*

바론이 한국에 왔다.

워싱턴에서 보고 근 넉 달만이다. 우리는 내일모레 비 오는 잠실의 석촌호수에서 만나기로 했고, 내 마음은 천근만근이다. 그를 보고 싶지 않다. 그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부담스럽다.


사람의 마음이란 대체 뭘까. 친구라고 느낄 적엔 말 한마디를 해도 시처럼 읊는 것이 섬세하고 다정해 보였는데 이제는 덜컥 겁부터 난다.

지방 출장을 가서 절간의 소나무숲 사이를 거닐고 있는 나에게 말한다. 지금 자신은 서울 국립 박물관에서 그림 속의 소나무를 보고 있다고. 같은 시간에 대화를 하며 하나는 살아있는 소나무와 함께 있고 하나는 종이 속의 소나무 그림 앞에 서있으니 이 우연이 놀랍고 즐겁지 않느냐면서. 글쎄, 그냥 우연인 것 같은데.


바론이 껄끄러워졌다. 친구였을 때는 좋게만 보였던 것들이 더 이상 편안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나 때문에 캘리포니아에서 워싱턴 디씨로 휴가를 낸 바론. 테오도르와 밤을 같이 보내고 귀국하는 길에 호텔 앞에서 나를 기다렸던 바론. 출국 직전까지 공항 앞에서 나를 마중했던 바론. 한국에 와서도 일주일에 세 번은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바론.


이번에 만나면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고 먹고 싶은 술을 사줄 것이다. 내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비가 오는 날씨지만 바론이 하루라도 빨리 나를 보고 싶어 하니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켜 나갈 것이다. 날씨를 핑계로 시내구경은 뒤로 미뤄버리고 실내에서 별 볼 일 없는 얘기나 나눌 것이다. 바론을 배불리 먹이고 나면 출근을 핑계로 일찍 집에 들어가야지. 술에 취할 새도 없이, 감상이 젖을 틈도 없이. 한국에 한 달이나 있는 동안 두어 번 더 만나고 레스토랑을 가고 공항까지 바래다주면 워싱턴에서부터 바론에게 느꼈던 부채감은 사라질 것이다. 그 일을 끝내고 나면 빚을 변상한 심정으로 자연스럽게 멀어지겠지. 정말 좋은 친구이기만 했더라면 이 모든 일정이 기껍고 즐거웠을 텐데.

지금 나는 가기 싫은 곳에 끌려가는 느낌이다. 보기 싫은 영화를 억지로 보는 느낌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싫다. 나도 바론을 이렇게 짐처럼 느끼고 싶지 않았다. 진심으로.


바론과의 시간은 힘들다. 그의 영어는 너무나 미국식이고, 내가 모르는 숙어와 유머를 사용하고, 나의 서툰 표현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 꼭 두어 번 되물어서 대화의 흐름이 끊기게 되니 영어를 못하는 무안함은 내 몫이다. 예전에는 내가 가진 외모에 대한 칭찬도 내 존재에 대한 찬미도 그러려니 하고 들었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거북스럽다. 왜 나한테 그렇게까지 말을 해? 너한테 내가 뭐라고.

바론은 나를 프레시 에어 앤 썬샤인이라고 부른다. 나와 있으면 신선한 공기와 함께 햇살이 드는 것 같다고 지어준 별명이었다. 예전에는 그 마음이 그렇게 예쁘고 고마웠는데 이제는 그냥 이름으로만 불러주는게 더 좋다. 왜 내가 너의 햇살이야? 왜 내가 너의 공기야?


처음 바론에게 워싱턴 디씨로 온 이유에 대해 말했을 때, 바론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미안한데, 그 친구는 너한테 전혀 관심이 없는 거야. 사람 마음이 뜻대로 될 수는 없는 거니까. 상처를 회복하는 건 시간에게 맡기고 이제 다른 더 좋은 생각을 하자.”


지금도 바론은 테오도르 얘기를 하면 답을 하지 않는다. 그럼 나는 더 테오의 이야기를 꺼낸다. 날씨가 너무 예뻐서 워싱턴 디씨가 그리워.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여름이 무르익는데도 기운이 나지 않나 봐.

바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대로 서서히 멀어지고 싶다. 한때 내 고민을 들어줬던 고마운 인연으로, 테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듯 나 역시 그를 좋아할 수 없었던 안타까운 사람으로. 얼른 바론의 여행이 끝났으면 좋겠다. 지구 반바퀴의 거리에서 슬쩍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지내고 싶다. 그냥 가끔 생각한다.

테오도르, 너도 내가 갔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고.






매거진의 이전글 대체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