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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Sep 04. 2023

Washington 15. 우리, 친구지?

과연 그럴까?


늘 인간에 대한 공포에 떨고 전율하고 또 인간으로서의 제 언동에 전혀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고뇌는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상자에 담아두고 그 우울함과 긴장감을 숨기고 또 숨긴 채 그저 천진난만한 낙천가인 척 가장하면서, 저는 익살스럽고 약간은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

생리할 때가 한참 지났는데 피임약을 먹고 있어서 그런가. 무기력과 우울감이 온몸을 꽉 쥐고 있다. 간밤 내내 잠이 안 와서 수면제 두 알을 먹었다가 비냄새에 눈이 번쩍 떠졌다. 바론은 참 운이 더럽게 없군. 몸을 일으키자마자 처음 한 생각이다. 정말, 너를 만나는 날은 하나같이 구질구질하고 짜증스럽구나. 이게 바론 때문인 건지, 생리 증후 때문인지, 모난 내 성격 탓인지 이제 구분할 수도 없다. 너를 만나는 날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날씨야. 어둡고 축축하고 비가 내리는.


아마 바론도 똑같이 생각할 것이다. 비 오는 날엔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기 싫다고 귓구멍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으니까. 지난번에 만났을 때는 근사한 저녁을 얻어먹고도 못된 말만 골라서 했다. 어떻게든 날 싫어하게 하려고 안달이 난 것처럼. 표독스러운 나에게 끄떡없는 바론이 존경스럽다. 그러니까 이 거지 같은 날씨에도 군말 없이 너를 만날 준비를 한다. 지치고, 우울하다. 오늘 나는 너에게 또 어떻게 못되게 굴게 될까. 그냥, 네가 빨리 캘리포니아에 돌아갔으면 좋겠다. 연락해도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연락이 되지 않는 테오도르처럼.


나는 정말 모르겠다. 원체 다정하고 친구를 중요시하는 사람을 두고 날 좋아한다고 착각을 하는 건가? 하지만 삼십 년 동안 쌓은 교훈은 말한다. 조금이라도 나를 의심하게 하는 사람한테서는 일단 도망치라고. 그러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한 상황은 없을 거라고. 의심은 아무것도 뿌린 것 없는 땅에서 자라지 않는다. 저 허울 좋은 탈 아래에 뭐가 들어있을지 나는 알 수 없다. 이래서 남자와 여자가 싫은 것이다. 아예 외적으로는 구분이 갈 수 없도록 똑같이 생겼으면 좋겠다. 저도 모르게 겁을 왈칵 집어먹고 피하게 되잖아. ’ 사람‘은 좋아하지만 ’남자‘는 힘들다. 내 옆에 돌아다니는 대부분이 그냥 사람인데, 어느 순간 달리 보이는 때가 있다. 가만히 있다가도 이상한 숫내를 풍기는 때가. 어울려 놀던 이가 ‘사람’이 아니라 ‘남자’로 인식되는 순간은 정말 유쾌하지 않다. 지금껏 알던 것과는 생판 다른 생물을 보고 있는 기분이다. 바론이 아무리 나에게 친구라서 아끼는 것뿐이라고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자기 입으로 우리는 친구라 말하는 남성들에게서 좋은 꼴을 본 적이 없다. 바론은 술을 잔뜩 먹으면 내 손을 잡고 손등에 입술을 부빈다. 당연히 맡겨놓은 것처럼 그렇게 군다. 바론이 한 번 더 그 짓을 하면 나는 정색하고 말할 것이다. 토할 것 같으니까 하지 말라고.


우리, 친구지?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다 친구다. 우리가 친구라는 걸 못 믿을 때나 물어보는 말. 저 말이 나오기 전에 도망가야 한다. 친구는 저렇게 묻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은 우리 친구 하자, 해서 친구가 되지 않으니까. 그저 마음 맞는 이들과 소통하며 살뿐이니까. 그래서 나는 굉장히 너에게서 도망치고 싶어. 끊어낼 핑계가 없을 뿐.


바에서는 신나고 밝아 보이니까 재미있는 애인줄 알았지? 웃음 많고 헤실하게 구니까 사람이라면 다 좋다고 따라갈 줄 알았지?

내가 바 밖에서 사람을 만나지 않는 이유는 이것이다. 바 안에서의 내 모습을 싫어할 사람은 너무나 드물고, 그래서  바 안에 있을 때의 나를 기대하는 사람에게 유독 더 패악을 부린다. 바 안에 있는 내가 좋았으면 바를 찾아왔어야지 왜 밖에서 이래. 나는 바 밖에서도 그렇게 낙천적이고 천진난만한 사람이 아니야.

많은 손님들이 착각을 한다. 어떤 바텐더는 바 밖에서도 바 안과 똑같을 거라는 착각. 바 밖에서도 바에 손님으로 갔을 때처럼 자신을 기쁘고 즐겁게 해 줄 거라는 착각.

근무 외 수당을 받을게 아니라면, 글쎄.


오늘은 바론과 내가 전에 일했던 바에 가기로 했다. 내가 너의 바텐더였던 곳에. 내가 마지막으로 바텐더로 서있던 곳에. 한 공간에서 일하던 동료를 마주 보고 네 자랑을 할 것이다. 캘리포니아에서 워싱턴 디씨까지 날 보러 와줬다고, 지난주엔 맛있는 코스요리도 사줬다고. 오늘은 내가 살 테니까 먹고 싶은걸 다 먹으라고.


후. 네가 얼른 캘리포니아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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