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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Sep 17. 2023

제임슨이나 드세요

이렇게 건방진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

 

아가 4:1-16 


*

진짜. 너무 재수 없고 꼴불견이라 얘기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는 사랑받는다. 늘 사랑받는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테오도르 얘기에 열을 올리지만 내가 태평하게 그를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은 당장 옆에 있는 바론이 나에게 이유 없는 헌정을 하기 때문이다. 어제 그는 나에게 오른쪽 어깨를 바쳤다. 그리고 오늘 또 말한다.

‘기분이 안 좋아? 자꾸 화가 나? 그럼 내 어깨를 빌려줄게. 그걸 마구 때려. 그럼 괜찮아질 거야.‘

나는 진심으로 바론에게 묻고 싶다. 대체 나한테 왜 그래? 내가 너한테 뭘 해줄 수 있는데.


내일은 바론과 북한산을 올라간다. 하이킹을 하는 날이다. 워싱턴디씨에서 만났을 적 약속한 거라 이제 와서 뺄 수도 없다. 제임슨 로고가 박힌 플라스크에 위스키를 가득 채워 갈 거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다가 떨어지던지, 말던지. 그럼 바론이 타살용의자가 되겠지. 나는 방금까지 사이비 종교 아가동산의 재판을 고발한 소설, <뽕나무와 돼지똥>을 읽었다. 세상 모든 게 위험해 보인다. 그러니까 건들지 말라고.


바론의 우정은 정말 눈물 날 지경이지만, 오늘 내가 얘기하고 싶은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게 어언 2년 반. 쓰레기 같던 싱가포르의 이상한 바에서 만난 동갑내기 손님, 벤에 대한 이야기다. 난 진짜 얘가 나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벤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못생겼다는 것. 나에게도 취향이랄 게 있으니, 굳이 꼽자면 나의 이상형과 정 반대로 생긴 얼굴이다. 둥글 뭉툭하고 투박한 인상. 이목구비에 날카로운 것이 단 하나도 없는. 벤은 날 처음 본 날부터 좋아했다. 그때부터 번호를 물어왔다. 나는 여느 손님을 대하듯 웃으며 넘겼고, 그의 번호가 적힌 냅킨은 아마 이름도 모를 쓰레기장에서 소각되었을 것이다. 이상한 바에서 일하는 길지 않은 사 개월 동안, 우리는 네 번 정도 얼굴을 봤다. 어김없이 구애를 했고 나는 무난하게 무시했다. 벤과 같이 오는 변호사 일행은 질이 나빴다. 개차반 까지는 못되었지만 무례하고 경솔한 언행을 했다. 나의 심기를 다분히 거스르는, 이상한 곳에서 더 나가고 싶어지는 발언들을 하는 일행과 같이 온 동갑내기 벤. 나는 벤이 싫다. 끼리끼리 오는 일행도 싫다.


밴이 나에게 연락이 온 것은 귀국하고 자가격리가 막 끝났을 때였다. 락다운 때문에 한 달을 내리 쉬었으니 대략 이 개월 만에 하는 문자였다. 어디서 보았는지 인스타그램으로 연락이 왔다. 나는 벤에게 번호를 준 적이 없으니까.

새해 인사를 보냈다. 시작되는 2022년 1월,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상투적인 말. 이때는 나도 실없이 답장했다. 와,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나도 네가 보고 싶어. 한국 오면 연락해.


그리고 그 후로 계속, 벤은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에게 문자를 한다. 때로는 음성 메시지를 보내기도 하고, 사진을 보내기도 하면서. 나는 그 문자에 기분이 좋으면 대답하고 내키지 않으면 무시한다. 아니꼽게 군다 싶으면 미운 말도 서슴지 않는다. 내가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우린 친구 이상이 되지 않을 거라는 말을 몇 번이나 써서 보냈는지 셀 수도 없다. 오늘 받은 벤의 답장은 이거였다.


‘네가 틀렸다는 걸 알게 될 거야, 프리티.‘


우웩. 싱가포르에 있을 때도 느꼈지만, 그 나라는 어딘가 촌스럽고 구시대적이다. 남자들은 여전히 마초여야 하고 여자들은 비쩍 마른 바비 인형 같은 나라. 틀에 박힌 성 역할에 조금도 반항하지 않는 나라. 테두리 밖은 철저히 외계인이 되는 나라. 그래서 벤이 하는 연락이 싫었다. 구린 작업멘트가, 걸핏하면 나의 섹시함을 칭찬하는 문장이, 쓸데없이 넘치는 자신감이 싫었다. 생김새만큼이나 내가 원하는 애정표현의 정반대의 방식만 골라 말하는 벤. 슬플 만큼 나의 입맛을 뚝뚝 떨어뜨리는 벤. 그럼에도 일 년 반동안 변함없이 나에게 구애의 편지를 보내는 벤.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근본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나는 건방진가? 버릇이 없나? 하지만 나는 너에게 나를 사랑해 달라고 애원한 적이 없다. 지금 나에게 애원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너잖아. 얼굴을 보고 싶다고, 비디오콜을 하고 싶다고, 오늘 하루는 어땠냐고 안달을 내는 것은 너잖아. 그리고 나는 대답한다.

‘나는 사진 안 찍어’

‘난 너랑 영상통화 하기 싫어’

‘너한테는 말해도 모를 텐데’


난 정말 못됐다. 얘한테 잘 보이고 싶은 생각이 단 하나도 들지 않는다. 테오도르에게 연락이나 왔으면 좋겠다. 우리가 원나잇스탠드가 아니었다는 확신이 들 수 있도록. 테오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은지 한 달째, 나는 또 벤에게 나쁜 말을 했다.


‘너 한국말도 못 하고, 한국에 있지도 않고, 우린 고작 다섯 번 봤잖아. 나는 널 안 믿어. 우리는 잘 될 일이 없어.’


이 말에 대한 답이다.


‘네가 틀렸다는 걸 알게 될 거야, 프리티.’


허허. 진이 빠진다. 마지막까지 나에게 묻는다.

‘한국에 있지도 않다는 건, 언젠가 내가 한국에 가면 만나주긴 할 거라는 거지?’


파하,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 만나줄게.


밴에게 말했다. 나를 사랑하는 만큼 제임슨을 마셔줄래? 하루에 한 박스씩, 일 년에 천 톤씩. 벤이 대답한다. 난 이미 알코올 중독상태야. 지금도 제임슨을 마시고 있거든.


나는 알 수 없다. 왜 벤이 나를 이렇게 좋아하는지, 왜 바론은 매일 밤 나와 저녁을 먹고 싶어 하는지, 왜 테오도르는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는지.


나는 사랑받는다.

내가 재수 없다는 걸 안다.

그래서 뭐 별 수 있나.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 제임슨이나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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