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인 Sep 20. 2023

Washington 16. 테오, 너는 뭐 해?

내 생각은 해?


벗은 설움에서 반갑고

님은 사랑해서 좋아라

딸기꽃 피어서 향기로운 때를

고초의 붉은 열매 익어가는 밤을

그대여, 부르라, 나는 마시리


_김소월 '님과 벗'


*

어제는 처음으로 재택근무를 했다. 바텐더들끼리만 하는 우스갯소리지만, 우리는 코로나 기간 내내 재택근무를 선망하며 보냈다. 집에서 일하는 건 어떤 느낌일까?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재택근무를 해보고 싶다.


이런 기분이로군.


부러 재택근무를 신청한 이유는 바론을 만나기 위해서다. 저녁 약속에 퇴근하고 정신도 없는 꼴로 허둥지둥 가고 싶지 않았다. 집에서 안경 쓰고 업무 메일을 보내다가 느지막이 만난 바론. 늘 나보다 이십 분 먼저 와서 레스토랑에 앉아있던 바론. 내일이면 캘리포니아로 돌아가는 바론.


정말 어쩌면 이렇게 테오도르 생각이 나게 하는지 모를 일이다. 반갑고 즐겁고 영어도 잘 나오고 있는데 머릿속에서는 최근 들어 연락이 되지 않는 테오의 얼굴만 가득이다. 사람 마음이란. 이제와 하나하나 흠집만 보이는 관계.


근사한 스테이크 바에서 저녁을 먹고 칵테일을 마시다가 지인이 있는 바로 자리를 옮겨 또 마셨다. 한국에서 가보고 싶은 바가 있다는데 마침 또 안면이 있는 곳이라 택시를 타고 삼십 분을 달렸다. 하룻밤새 클래식 바를 다섯 군데나 돌았다. 어디 하나 부족한 곳 없이 최고의 장소만 골라서. 이러니 저러니 해도 바론에게는 좋은 걸 주고 싶다.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시시하고 초라한 건 보여주기 싫다. 어깨를 잔뜩 부풀리고 뽐을 냈다. 이 정도면 남은 빚은 탈탈 털어도 좋을 만큼 아낌없이 주었다. 몇 시간 후면 바론은 한국을 떠난다.


바론은 워싱턴에서 내가 궁금해하던 녹색 타바스코 소스를 선물로 가져왔다. 귀여운 짓이다. 아끼는 나의 벗, 만나고 헤어질 때까지 내가 하는 테오도르 얘기를 들어줘야 하는 바론. 내가 테오의 아파트에서 나와 입을 맞추고 택시를 탈 때 호텔 앞에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바론. 내 몸무게보다 무거운 캐리어를 묵묵히 공항 앞까지 들어다 준 바론. 사랑하는 님은 살았는지도 죽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가을비 내리는 9월의 밤은 깊어만 간다. 초록색 옷을 입고 초록색 병에서 나온 술로 만든 칵테일에 취하는 밤. 가문 땅을 적히는 비냄새가 나는 밤.


테오. 너는 뭐 해? 내 생각은 해?

내 생각 하지 말고 제임슨 마셔, 이 나쁜 새끼야.





매거진의 이전글 제임슨이나 드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