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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Sep 29. 2023

사는 건 중력에 지지 않는 것

운동선수들이 그렇게 빛이 나는 건

직접 찍은 뮌헨의 시녀이야기


또 어떻게 보면 그들의 머리는 이런저런 잡다한 것들, 밀가루나 반죽 같은 것으로 채워진 주머니처럼 보이기도 한다. 명백히 드러나는 머리들의 무게, 텅 빈 공허함, 중력이 머리들을 밑으로 끌어당기고 있으며 고개를 쳐들 목숨이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는 느낌은 끔찍스러웠다.


마거릿 애트우드, <시녀 이야기> 중


*

얼마 전에 필라테스를 시작했는데 고관절이 엉망이라고 한소리를 들었다. 어깨는 굽어있고, 목도 거북목이지만 가장 심각한 건 다른 사람들의 반에 반에 반도 돌아가지 않는 뻣뻣한 고관절이라고. 어디 가서 건강치 않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데 너무 조곤조곤 야단치시는 통에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그렇군요. 제 다리가 붙어있는 부분은 거의 양철 쓰레기통이나 다름없었군요. 어쩐지 서글프다.


아무것도 모르는 햇병아리 신입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만 있다. 영어로 된 자료를 뒤적이다가, 헤드폰을 끼고 영어로 된 교육과정을 듣다가, 감기는 눈꺼풀을 못 참아서 조금 졸고, 고개를 털면서 텀블러에 오렌지주스를 따르러 나가는 게 일하는 전부다. 요즘 제일 고민하는 건 내일 먹을 점심메뉴다. (첫날은 수육에 잔치국수를, 둘째 날은 종로에 유명한 곱육개장을, 셋째 날엔 매콤한 게살비빔밥 넷째 날엔 하와이안갈릭쉬림프라이스를 먹었다. 어제는 통치킨살 오므라이스, 오늘은 튀김범벅에 야들야들한 순대. 그리고 내일은 냉면 마냥 면이 얇은 짜장면을 먹으러 갈 생각이다. 벌써부터 신이 난다. 룰루랄라.) 바텐더일 적에는 하루 열 시간씩 서서 일하다가 앉아만 있으려니 좀이 쑤시다. 의자 밑 두 다리를 어떻게 놔야 할지 몰라 꼬았다가 괴었다가 뻗었다가 굽혔다가 정신이 없다. 무슨 짓을 해도 몸이 뻐근하다. 듀얼모니터를 쓴다고 해도 저절로 모가지가 내려가서 어깨가 굽는다. 거북이. 거북이 모양이다. 나는 지금 신입 거북이. 필라테스 선생님이 안쓰러워하는 몸뚱이를 가진.


시녀이야기는 미국까지 가져갔다가 이제야 다 읽은 미안한 책이다. 고등학교 때 읽었었는데 내용이 거의 기억나지 않아서 다시 꺼내왔다. 독일에서도 시녀이야기 드라마의 포스터를 보고 워싱턴의 박물관에서도 시녀이야기 드라마의 촬영 의상을 보았다. 마주칠 때마다 반가운 것 치고는 머릿속에 남아있는 게 하나도 없어서 재독을 결심한 책. 좋은 책이었다. 지금 시대에, 지금 나이에 읽으니까 그때보다 딱 스무 배가 더 좋다. 문장 한줄한줄이, 은유와 신랄함이.

문장은 주인공 시녀가 교수형 당한 시체를 보고 생각하는 말이다. 중력이 온 힘으로 인간을 끌어내리는데, 그 몸 안에 중력에 반하여 머리를 치켜들어줄 목숨이 없으니 죽은 몸은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는다. 목숨이란 그렇게 힘이 있고, 역동적이고, 기운 찬 것이다.

사무실에 앉아있으면 온몸이 무겁다. 한 번을 못 앉고 밤새 바 안을 분주히 돌아다닌 날 종아리와 발바닥에 느껴지는 욱신거림과는 다른 무거움이다. 바에서의 통증은 잊기 힘들다. 심장이 푹푹 퍼올리는 피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나의 하반신 중에서도 아래쪽, 가장 아래쪽에 고일 때. 종아리와 발바닥이 퉁퉁 붓는 씁쓸함. 그러고도 계속 걸어야 하는 고단함.

앉아있는 것은 내가 바위가 된 느낌이다. 척추를 구기듯이 엉덩이를 붙이고 컴퓨터 모니터에 고개를 들이박는다. 직립보행을 하기 위해 진화한 신체가 팔걸이가 있고 헤드레스트가 있는 도구에서 일곱 시간 여덟 시간을 머문다. 눈알은 건조하고 따가워서 한 시간에 한 번씩 안약을 넣어줘야 한다.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인지 뭔지를 하루빨리 사야 되겠다. 마우스 휠을 돌리는 바위가 되어서 사무실 의자 위에 놓여있는 나. 생명도 있고 힘도 있는데 교수형 당한 시체처럼 척추를 구기고 앉아있는 꼴이 우습고 편안하다. 온몸이 어긋나는 게 느껴지지만 아마 내가 죽은 상태였다면 큰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 앉아있다 ‘는 상태는 서있는 것보다 안정감이 든다. 피로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이대로 천년만년 의자에 붙어있을 수 있을 것 같다. 7년을 서서 일한 나는 아직도 앉아서 근무하는 것에 로망이 있다. 앉는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운동선수들이 아름다운 것은, 그들이 앉지도 서지도 않고 어느 한 동작에 박제되지 않은 채로 활동하는 데에 있는 걸까. 계속 앉아있는 것과 계속 서있는 건 그저 죽지 않은 상태와 다름이 없다. 좀비들은 죽어서도 앉지 않는다. 불안정한 모양새로 서성서성 걷는다. 가장 피곤한 때의 바텐더 같은 걸음걸이다. 앉아있는 것은 좀비가 하기엔 과분하고 회사원이 하기엔 적절한 정도의 반(1/2) 죽음이다. 회사원들은 모두 일어나고 싶어 안달이 나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기를, 당장 퇴근 할 시간이기를. 이렇게까지 무릎관절을 쫙 피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우리의 몸은 다 이것저것 잡다한 것들, 밀가루 반죽 같은 것들로 꾸역꾸역 채워 넣은 시체덩어리다. 시체가 되기 전까지 살아서 움직이는 것뿐이다. 하루, 한 달, 평생 동안 온전한 시체가 되는 연습을 하기 위해 서고 앉으며. 목숨이 빠져나간 느낌은 보는 사람에게 분명히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의 말마따나 고개도 두기 싫을 만큼 끔찍스러울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한다. 시체 안에 들어있던 목숨은 얼마나 그것을 붙잡아둔 올무 같은 몸뚱이를 벗어나고 싶었을까. 사직서를 내고, 책상을 뒤집고 박차고 나오고 싶었을까. 영원히 쉴 수 있게 되어서 지금 얼마나 안도하고 기뻐하고 있을까. 목숨이 시체에 갇혀서 무슨 혹사를 당했는지, 심장이 지금껏 얼마나 고단 했을지를 생각하면 죽음도 꽤 기꺼워질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하지만 그래도, 결국은 죽지 않고 중력에 지지 않고 계속 가엾은 심장을 사용해 별로 무겁지도 않은 머리를 쳐들면서 살고 싶다. 아직 심장의 직무유기를 받아들일 자신도, 용기도 없는 인간이다. 사무실 의자에 어색하게 앉아있는 나의 등이 오늘보다 더 굽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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