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인 Oct 24. 2023

홍콩의 재벌과 이혼해보고 싶다

양자경처럼.


You are capable of anything.

Because You are so bad at everything.


영화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중


*

구제불능이다.

일상부터 인생까지 이렇게 마구잡이로 엉켜버려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

내일이 오는 게 두려워 미치겠는데 해가 뜨면 몸을 일으켜야 한다는 부담감도, 무얼 해야 하는지 모르는 채로 같은 버스에 실려가는 출근길도 그대로다. 포기인지 해탈인지도 모르겠다. 뭔가를 잘해보고자 하는 다짐은 여덟 시간을 채 가지 않는다. 일주일에 딱 하루 정신없이 쉴 수 있는 날, 태만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십만 원이 넘는 돈을 주고 산 마케팅 도서들은 라면 국물이 묻은 채로 책상 한편에 쌓여있다. 내일이 되면 다시 읽기 시작해야지. 또 도망칠 수 없는 현실에서 아직까지 뜬구름 같기만 한 오피스에 앉아있어야 하니까.

나 말고 모두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는 곳에서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입사한 지 육 개월이 넘어가는데 왜 나는 아직도 이모양인지. 열세 권의 마케팅 책을 다 읽으면 그때는 내 일을 어렴풋이라도 알 수 있을는지. 그럼 이 밑도 끝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사무실이 좀 편안해지는 건지. 머리가 하도 뜨끈뜨끈하니까 편두통 진통제를 간식처럼 먹는다. 여기에서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만 안다. 그것밖에 알 수가 없다. 이 회사에서 나는 모든 것에 쓸모가 없다.


영화 속이라면 이런 나라도 뭔가 할 수 있는 놈이라는 대사를 들었을 수도 있겠다. 그만큼 답이 없으니까. 또렷해지기라도 할라치면 득달같이 진흙탕 속에 처박히니까. 잘하는 게 하나 없어서 뭐든지 잘할 수 있다는 말은 양자경이니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나도 양자경처럼 영화 밖에서 변호사 출신 아버지가 영국 무용학교에 보내주고 홍콩의 재벌이랑 이혼도 해봤으면 좋겠다.


뭐 하나 좋은 생각이 드는 게 없는데 글도 쓰지 않고 보내려니 절망이 아깝다.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이 아프면 내가 지금 아파 죽겠다고 적어놓기라도 해야겠다. 나중에 산업재해 처리를 할 생각으로 세심하게 적는다. 스트레스가 극심하고, 그렇다고 손 놓고 놀고 있는 건 또 아니고, 가끔 죽고 싶지만 내일도 출근을 해서 뭔가를 하고 누구를 만날 것이다. 대부분 풀리지 않고 어그러지고 빠그라질 뿐이지만 어떤 순간에는 즐겁고 재밌다는 생각도 할 것이다. 역시나 맞지 않는 일이었다고 자책하고 한숨 쉬지만 후회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해보는 데까지 해보자,라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게으르게 휴일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월요일부터 다시 분주해지고, 압박에 시달리고, 초조해지고, 좌절스러워지고.


넌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무엇이든 너무 못하니까.


그냥 문장 하나를 생각하면서, 지끈거리는 머리로 핸드폰 메모장에 글을 쓰면서. 또 연옥 같은 아침해를 기다리다가 내일을 맞는다. 인생이 뒤죽박죽 어떻게 흘러가든 어김없이 돌아가는 지구 때문에, 결국은 아무것도 잘하는 게 없는 인간이라는 걸 가장 잘 아는 게 바로 나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너무 못하는 건 그냥 못하는 거야.

아침에 눈 떠서 지각이나 하지 마라.




매거진의 이전글 사는 건 중력에 지지 않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