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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Nov 03. 2023

누군가한테는 미소천사

침몰하는 배에 타고 있는, 미소천사!



”나쁜 예감은 침몰할 배에 실어서 보내세요. 그 배는 ‘슬픔의 섬’에 부딪힐 텐데, 당신이 거기 타고 있으면 안 되잖아요. “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그렉 버렌드&리즈 투칠로

*

침몰할 배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항해 중이다.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탈탈 털리니 탈수기에 너덧번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핼쑥하다. 이런 울적한 상황에서 사고 싶었던 위스키 책이 절판이라 취소처리 되었다는 문자까지 받았다. 베개에 머리를 처박고 울고 싶다. 흑흑. 이 나쁜 놈들아.

사람이란 게 뭔지 신체 온도가 3도는 올라간 것처럼 열이 받아도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는다. 차라리 울어버리면 침몰할 조각배가 호화 크루즈 1등석처럼 예뻐 보일까. 지금 바다에 뛰어내려도 날 기다리는 건 상어 뱃속이나 식인섬뿐일 텐데. 하루도 속으로 욕을 안 해본 날이 없다. 침몰 확률 100프로의 보트가 아늑하게 느껴질 정도로 불행에 적응해가고 있다. 정진하는 불행에 당당히 올라타있는 나.

오늘 나는 손바닥 만한 모닝을 몰고 춘천의 주류마켓에 갔다 왔다. 하늘을 향해 뚫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두들겨 맞으며 기상 한 아침. 베갯잇과 발매트를 세탁기에 돌리고 발발거리는 로봇 청소기를 쫓아다니다가 생각했다. 오늘처럼 아무 계획 없이 하늘만 더럽게 예쁜 날, 미루고 미뤄왔던 제임슨 오렌지와 제임슨 IPA 에디션을 사야 한다고. 제임슨 에디션 시리즈는 오래전에 수입이 끊겨 춘천에 있는 거대한 주류업장에서만 구할 수 있다. 편도 두 시간 반의 아득한 거리, 엉덩이를 떼려면 용기와 의욕이 필요한 길. 오늘뿐이다.

운전석에 앉아 여행에 어울리는 플레이리스트를 검색했더니 디제이디오씨의 여름이야기가 나온다. 좋은 선곡이다. 꽉 막힌 고속도로를 타고 브레이크 반 액셀 반으로 달린다.

혼자 운전을 하면 양말 없이 신발을 훌렁 벗고 맨발로 페달을 밟을 수 있어서 좋다. 실없는 버릇이지만 하와이 여행을 갔을 때 미군 친구 레이놀즈가 베티라는 이름의 문짝 없는 지프를 맨발로 운전하는 걸 보고 난 후부터 습관이 들었다. 그 해방감을 한번 맛보면 신발양말을 신은채로는 답답해서 견딜 수 없다. 운전석에 앉을 때마다 핸들을 어루만지며 말한다. 초패 오늘도 잘 부탁해, 항상 고마워. 초패왕은 손바닥만 한 풀색 모닝의 애칭이다. 해인의 초패왕.

왜 운전할 때마다 글이 쓰고 싶어 지는지 모를 일이다. 눈앞에 초록불이 보일 때의 쾌감과 액셀을 눌러 밟는 앞꿈치의 튼튼함을 글로 쓰고 싶은데 그 기분이 제일 좋은 것도 운전할 때뿐이라 차에서 내리고 나면 어쩐지 흐지부지 해진다. 풍성했던 글감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내 인생의 신호등에도 초록불만 주렁주렁 매달려있었으면, 하는 실없는 생각만 남아버리는 것이다.

운전하는 것은 재미있다. 내 몸의 몇 배나 되는 쇳덩어리를 끌고 대화도 몸짓도 통하지 않는데 다른 쇳덩어리들과 도로를 공유한다. 아슬아슬한 교통법규에 의지하면서도 옆차선 유리창 안에 조금이라도 인애가 있는 인간이 들어있기를 바라면서. 좀 무섭고 신기한 일이다. 마음껏 말을 해도 소통이 될까 말까 한 세상에 자동차 안에 덜렁 실려서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이 있다는 게. 슬쩍 차선 앞자리를 내어주면 깜박깜박 전해오는 감사인사에 슬쩍 미소를 지어버리게 된다는 게. 그래서 나는 다른 차량을 끼워주는 일을 좋아하는 편이다. 엎드려서 절 받기지만 그렇게 생색을 내고 인사를 받으면 기분이 나아진다. 말 한마디 없이 껌벅거리는 불빛으로도 충분하다니 이런 거야말로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 아닌가. 침몰하는 배에 실려 곧 익사할 사람의 소소한 즐거움. 앞차에 끼워주고 뒤차에 인사하면서 천천히 흘러가는 침몰의 뱃길. 뭐, 운전은 재미있고 나는 웃으면서 침몰하는 중이라는 얘기다.

두 시간 반을 달려온 세계주류마켓에 제임슨 오렌지와 IPA는 없었다. 수급이 워낙 드물어 스타우트 에디션을 건진 것도 다행이란다. 하지만 술은 원 없이 샀다. 농협 하나로마트에서 농부가 만들어주는 들기름 파스타를 먹고, 좁아터진 냉장고에 다 들어가지도 못할 병들을 보며 와인셀러를 주문했다. 스피커에서는 클론의 쿵따리샤바라가 흘러나온다. 왕파리 눈알 같은 선글라스를 이마에서 끌어내리고 다시 맨발로 액셀을 밟는다. 하고 싶었던 드라이브를 실컷 하고 처음 보는 맥주도 건진 휴일이다. 세탁기에 꺼내서 양달에 널어놓은 발매트처럼 나도 살균되는 듯한 기분이 드는 하루.

초패왕의 키링에는 시퍼런 두꺼비가 달려있다. 주말 외근에서 만난 손님이 준 선물이다. 진로 회사 로고가 박힌 근사한 열쇠고리. 회사에 들어오고나서부터 저도 모르게 다른 회사 술들을 흘겨보고 있었는데 손님의 손으로 건네받으니 기분이 묘했다.

’ 진로 거지만 고급스럽고 예뻐서 부끄럽진 않을 거예요. 술에 대해 잘 알려줘서 고마워요. 나 혼자 선생님의 이름을 지어봤어요. 미소천사. 다음에 볼 때는 미소천사라고 불러도 되죠?‘

4주간의 외근에 매주 만났던 알 굵은 안경을 쓴 손님. 팀장님한테 피가 새하얘지도록 혼이 나고, 클래스 시작 1시간을 앞두고 길이 막히고, 엄마아빠가 보고 싶게 하는 좋은 영화를 봤어도 나지 않던 눈물인데 주책맞게 낯선 사람에게서 남의 회사 키링을 받을 때 핑 돌고 난리다.

질 좋은 종이백에 들어있는 상자를 열어보니 반지케이스처럼 까만 에어캡에 벨벳 주머니가 들었다. 과연 반짝거리고 예쁜 모양이다. 지금도 주머니 안에서 자락거리고 있는 열쇠고리는 우리 회사 위스키들의 로고와 은색 두꺼비, 전투기 피규어가 꽃다발처럼 달려있다. 이 두꺼비는 여기저기 혼나느라 탈수기에 들어가 있는 사람도 누군가에게는 미소천사라는 증거물이다. 다음 주에 출근하면 나는 또 온도가 3도는 올라가겠지. 걸음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대겠지.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도 내가 하는 게 맞는 걸까 의심하겠지.

침몰하는 배의 돛대를 잡고 생각한다. 그래도 나는 미소천사. 누군가한테는 미소천사. 침몰하는 배에 타고 있는 미소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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