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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Nov 02. 2023

병이 들었나 봐

어딘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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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좋아했나 봐요. 병든 사람들은 깊고 진지한 사랑을 하죠."

​​

테네시 윌리엄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미치와 블랑시의 대화 중

​​


*

영화 어바웃 타임을 생각하는 중이다. 사랑영화가 목말라서 다시 보았는데 의외로 평생을 이야기하는 내용이었더랬지. 매일매일을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날처럼 의미 있게 사는 건 어떻게 하는 걸까. 같은 날을 돌아보았을 때 순간순간이 눈부시고 충만하다는 걸 자각하는 것은. 그래봤자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게으르고, 발을 재게 놀려 놓치기 싫은걸 다 하기보다는 가만히 앉아 볕을 쬐기를 원한다. 머릿속으로는 어바웃 타임이 전하려는 교훈을 생각하면서.

오랜만에 아빠집에 오니 하고 싶은 일이 많다. 할머니 얼굴도 봐야 하고, 가야지 가야지 하고 지금껏 못 가본 수목원도 구경하고 싶고. 옛 집 근처에 온 김에 아빠가 옆집에 준 바둑이 자식 개한테 간식도 주고. 강아지들 산책도 시키고. 물이 차오르는 갯벌도 보고. 머릿속은 분주하다. 저 중에서 한 것은 할머니한테 인사드리는 것. 개 산책 시키는 것(그나마 두 마리 중 한놈만 시켰다).

할머니를 보고 온 것은 할머니가 나날이 약해지고 작아지기 때문이다. 오늘 보지 못한 걸음을 후회하게 될 날이 올까 봐 뵈러 갔다. 당신이 죽은 뒤에 오늘을 후회할까 봐 왔어요,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래서 갔다.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라고 말하려고.

병이 든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지금 어딘가 아프다.

고통이 싫고 무서운 게 많은 겁쟁이라 죽음을 생각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왜 자꾸 그 너머가 편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할아버지 무덤에 엉덩이를 붙여 앉고 중얼거리고 있으면 풍경도 좋고 날씨도 좋다. 도자기 병 안에서 가루가 되어 매일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을 할아버지. 좋아하는 게 너무 많아서, 소중한 게 너무 많아서 그것들이 사라지고 망가지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어떡하죠? 할아버지가 살아있었으면 무어라 대답했을지 궁금하다. 대답은 없고 뙤약볕만 찐다.

이틀밤 아빠랑 술잔을 기울이는 중에 아빠가 같은 말만 세 번을 했다. 말을 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면서 입술만 달싹였다. 아빠. 그 말 삼십 분 전에도 했는데. 기억나세요? 아빠 같은 말 세 번째 하고 계시는 거, 알고 계세요? 홀아비로 시골에서 농사짓고 회사 다니며 혼자 사는 아빠는 치매를 앓았던 할머니와 치매 환자였던 아버지가 있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아득한 상황에 머리가 띵해진다. 한국에 있지도 않은 동생에게 ‘아빠가 또 같은 말을 세 번씩 했어’라고 문자를 보내놓고 밤새 뒤척인다. 치매가 온 아빠와 치매가 올 나. 인간은 왜 살아야 할까?

담뱃갑처럼 생긴 친할머니의 아파트는 낡디 낡았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내가 서울로 올라갈 때마다 4층 창문을 열고 차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치매 때문에 정신이 맑지 않았던 할아버지도 거동을 할 때까지는 같이 나왔다. 낡은 아파트 4층의 그 창문은 내가 사랑하는 노인 둘의 얼굴이 매달린 곳이다. 창틀만 보아도 눈물이 나는 곳이다. 오늘은 할머니가 나를 1층까지 바래다주었는데도 습관처럼 4층을 올려다봤다. 4층 창틀에는 아빠가 서있었다. 마른 팔을 괴고 손을 휘휘 저으면서 아빠가 있었다. 할아버지 없는 자리에 아빠가 있구나. 이 모든 소중한 기억들을 어쩌면 좋지. 이 폭풍같이 몰아치는 빛살 같은 기억들을 머리통 속에서 어쩌냔 말이야. 언젠가 아빠도 할머니도 저 창틀에 없는 날이 오면 나는 어쩌면 좋지.

병이 들었다.

어릴 때 아빠의 트럭을 타고 국카스텐이 부르는 ‘한잔의 추억’을 목청 높여 불렀던 때는 내 머릿속에만 있다. 그 여름하늘과, 눈이 멀 것만 같은 녹음과, 굽이굽이 돌던 산길의 도로는 더 이상 달릴 일이 없다. 그 시간은 그때로 끝인 것이다. 그 흥겨움과 그 순간의 벅차오름은.

영화 애프터썬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결국 누구도 모를 일이다. 내가 아니면 모른다.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는 게 힘들어질 때를 맞이한 것도 나다. 왜 살아야 하지?

좋은 기억들이 많아서 이보다 더 좋은 내일이 가늠되지 않는다. 개구리가 울고 잠자리가 나는 시골의 가을. 모기장을 뚫고 드나드는 모기에 질색하며 피웠던 모기향. 이 향기들이 차츰차츰 사라지는 걸 느끼고 있다. 마르고 늙어 같은 말을 반복하는 아빠와, 나에게도 있을 치매 유전자와, 그저 노쇠해 갈 몸뚱이와, 갈피를 못 잡고 머뭇거릴 인생 등등. 사랑하는 것을 사랑한 채로 남겨두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눈을 감는다. 감긴 눈이 편안하고 아늑하다.

이렇게 진지한데, 이렇게 심각하게 사랑을 생각하는데 머릿속이 병든 것 같은 느낌이다.

살아있는 것, 글을 쓰는 것, 책을 읽는 것이 힘겹다. 그중에 사랑이 제일 힘겹다. 병이 들었나 보다. 나는 병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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