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재미있게 살아버린 나!
그러나 사랑과 애정의 대상에 대한 이러한 애착은 어떤 공백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애착은, 우리가 부정의와 비인간성을 똑바로 대면하도록 배우는, 그래서 우리가 삶의 파괴와 보존 사이에서 선택하는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그런 보다 큰 맥락의 일부이다.
허버트 허시, <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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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삶의 파괴와 보존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니 정말 멋진 말이다.
뭘 얼마나 어떻게 사랑해야 얼른 이 삶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멈출 수 있을까? 이것을 위해서라도 계속 살아서, 더 살아나가서 죽음을 저 멀리에 두고 싶다는 마음은 대체 어떤 걸까. 뭘 사랑해도 나보다 더 사랑할 수가 없는데, 당장 내가 편해지려면 딱 한 방향 밖에 보이지가 않는다. 그렇다고 저벅저벅 그 길로 걸어갈 건 또 아니고. 액셀을 짓밟으며 그쪽으로 질주할 것도 아니고. 그냥 가을에 노랗게 물든 황화 코스모스밭을 바라보는 것처럼 하염없이 그 편을 향해 앉아있게 된다. 얼른 그 시간이 왔으면. 가을이 지나고 노을도 저물어 하늘이 새까매지는 그 시간이 얼른 이불처럼 내 몸을 덮어줬으면.
너무나 궁금한 일이다. 다른 사람들은 사랑하는 대상 때문에 살고 있을까? 살고 싶을 만큼 뭔가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만큼 사랑하지도, 소중하지도 않지만 그냥 사는 걸까?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에서 행복을 느끼고 따스함을 느끼지만 그 기분이 애착이라고 하기에는 별 뜻도 의미도 없는 일이다. 그것들만으로 살아가기에 삶은 너무 지루하고 중력은 무겁고 일상은 시큰둥하다. 여태껏 살아있는 건 내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과 애정의 대상에게 찰싹 붙어있고 싶기 때문이 아니라.
아쉬움이라는 게 들었으면 좋겠다. 죽기 전에 내키지 않는 척 뒤를 돌아보고 싶다. 삶에 남는 아쉬움, 그런 게 애착이라는 거겠지. 그게 미련이라는 거겠지. 늘 내일 당장 죽어도 후회 없는 인생이라고 당당하게 떠벌리고 다녔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은 그냥
그냥
그만큼 좋았는데 왜 마저 살아야 하냐는 의아함이었다. 내일 당장 죽어도 후회 없을 만큼 재미나게 살았으면 내일이 안 와도 되는 건 아닌지. 이전보다 기대되지 않는 나의 내일이 도대체 언제까지 이어져야 하는지. 사실 내일은 셈하기도 귀찮을 만큼 늘어서 있을 것이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 시간, 해가 뜨고 지는 시간, 계절이 변하고 다시 오는 시간을 다 합쳐 회사 계약기간 동안만큼의 내일이, 전세 계약 날짜만큼의 내일이, 대출 상환 일시만큼의 내일이 저 앞에 있다. 정말 따분하고 지루한 예정이다. 제발, 여기에서 하루라도. 이틀이라도. 거북이걸음이라도 좋으니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나에게로 가까워졌으면 좋겠다. 가을이 지나고 찾아오는, 노을 뒤에 내려올 새까만 무언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