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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Nov 05. 2023

동맥소리

살 아래 용암이 흐르는 소리

도미코는 가만히 누워 자기 동맥에 피가 흐르는 소리를, 자는 사람들의 숨소리를, 바람 소리를, 어두운 혈관이 흐르는 소리를, 꿈이 다가오는 소리를, 우주가 천천히 죽어가며 별의 거대한 정전기가 커지는 소리를, 죽은 자들이 걸어 다니는 소리를 들었다.

어슐러 르 귄,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중

​​

*

자기 전 침대에 모로 누우면 베개 너머로 쿵쿵대는 심장소리가 들린다. 가만히 그 횟수를 세어보다 보면 어딘가 아득해진다. 이 부품은 언제가 되어야 쉴 수 있을까. 지금도 쉬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 쉬게 해줘야 하는 건 아닐까.

사람의 몸을 생각하면 구역질이 나면서도 경이롭다. 피부아래 촘촘히 짜인 근육과 피와 뼈로 걷고 뛰는 나. 펄떡펄떡 신나게 말하고 사고하며 살아가는 나. 배를 갈라 부위를 나누면 정육점 안에 있는 저것들과 별 차이도 없을 텐데, 불판 위에 구워지는 살점이랑 맛도 식감도 비슷할 텐데. 어쩌다 보니 아직 살아서 깊은 밤에 손목에서 울리는 심장소리를 듣고 있다. 콩 콩 콩 콩, 소진되어 가고 있는 생명을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다니. 몸이 닳아가는 소리를, 심장에 녹이 스는 소리를.

공원에서 아가들이 뛰어노는 걸 보면 저때의 인간이 가장 근지럽고 움트는 시기라는 생각에 가슴이 울컥해진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저 분출되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에너지가 사랑스럽다. 마음껏 달리고 박차고 소리 지르기가 무섭게 어른이 되니까. 울면 손가락질당하는 어른이 되니까.

오늘은 유난히 졸음이 몰려오는 하루였다. 지금도 자꾸만 눈이 감긴다. 이 글을 올리고 불을 끄면 또 느릿한 심장박동이 들릴 것이다. 내 귀에 닿는 것이 심장소리뿐인 것은 다행인 일이다. 용암처럼 부글거리며 동맥을 타고 넘는 핏소리가 느껴지면 무서울 테니까. 사람의 몸에서도 소라껍질 속 같은 소리가 난다. 두 손바닥으로 귀를 막고 눈을 감으면 들리는 천둥 같기도 하고 파도같기도 한 소음이다. 양 옆에서 개구리 노래주머니처럼 부풀었다 꺼지는 작은 맥박도 있다. 어슐러 르 귄의 문장처럼, 어두운 혈관이 흐르는 소리는 꿈이 다가오는 소리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잠인지 죽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할 만큼 거대한 꿈을 몰고 오는 혈관의 소리. 우주가 천천히 죽어가며 행성의 전기폭풍이 커지는 소리. 이미 세상에 없는 것들이 수선스레 걸어 다니는 소리. 잠들기 전에 듣는 심장소리에는 쓸쓸한 공포가 있다. 언젠가 나는 꼭 죽게 될 거야,라는 예언을  듣는 기분이다. 그렇게 될 건 이미 아는데, 알고 있는데 잠든 아이 어깨를 두드리듯 나긋하고 단조롭게 귀에 대고 속삭인다.

너는 죽게 될 거란다.

오늘도 가만히 누워 동맥에 피가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자는 사람들의 숨소리를, 바람 소리를, 어두운 혈관이 흐르는 소리를, 꿈이 다가오는 소리를, 죽음이 안부를 전하는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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