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인 Nov 08. 2023

평생 남을 구멍일 줄 알았는데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지더라


할아버지, 밤은 왜 이렇게 새까만가요?



작은 보물이란 나 여기 있다라고 적힌 것들이야.

그것보다 조금 큰 보물은 아직 기억나니라고 적힌 것들이고.

그러나 무엇보다 큰 보물은 나 거기 있었다라고 적힌 것들이지.


헤르타 뮐러, <숨그네> 중 투어 프리쿨리치의 말


*

잃을까 봐 무서워지는 것들과 이미 잃어 무섭지 않은 것이 있다. 보물들이 몸피를 불린다. 지금 작은 보물은 언젠가 조금 큰 보물과 그보다 더 큰 보물이 될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세상에 영원하지 않고, 내 몸과 기억 역시 훗날 삭아 없어질 테지만 그전까지는 내가 가진 보물들이다.

인생에 굴곡이 없어 내가 가진 보물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큰 보물이 되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은 죽음인가 보다.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거기에 있었다는 묘비 하나만 남기고 사라지는 것이 다른 사람의 가슴에 보물로 남는 길이이구나. 사람은 모두 누군가의 보물일 것이다.

지금 가진 보물은 친할아버지 하나뿐이지만 이미 방을 맡아놓고 있는 사람이 여러 명 있다. 아직은 비어있는 방에 안도하는 것이 자리를 꿰차 만원인 보물상자를 보고 있는 것 보다야 훨씬 낫다. 지금 가진 작은 보물들을 아낀다. 언제 잃게 될까 무서워하면서도 이미 떠나버린 할아버지를 생각할 때만큼 간절하지는 않다. 무엇보다 큰 보물이 있다는 건, 그저 가슴에 구멍이 뚫리는 건지도 모른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새까맣고 깊은 구멍. 그걸 메꾸려면 얼마만큼의 흙이 필요한지 감도 잡히지 않는 그런 구멍. 그런 걸 품고 사는 것이 나 역시 누군가의 보물이 되는 과정인 걸까.


평생 남을 구멍이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던 하찮고 교훈적인 경험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그 당시의 어리고 내가 겪기에는 너무나 충격적이고 배신감이 커 이 것이 나의 인생을 바꿀지도 모른다고 엉엉 울었던 그 많은 일들. 나쁜 일들은 의외로 빠르게 무뎌진다. 길 가다 미친개에 물린 것이 나의 잘못이 아니듯 사람은 그렇게 털고 일어난다. 다시 살아가야 할 길을 찾는다. 미친개를 만나도 대응할 수 있는 기술과 요령을 터득하며 쑥쑥 커서 어른이 된다.

경험해 보지 않은 일로 타인을 재단해선 안된다. 삶과 생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들을 사람들은 각자 할 수 있는 선에서 감당해 낸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작은 생채기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피멍이 될 수도 있다. 끔찍한 흉터도 남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죽을 만큼은 아닐 수도 있다. 혹은, 죽는 것이 더 편하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나의 구멍들은 그렇게 깊지 않았고, 이제는 그럭저럭 글 한 편의 소재로 쓸 수 있는 가무잡잡한 보물이 되었다. 나는 기억한다. 실재하는 것은 작은 보물들이고 기억은 조금 큰 보물이며 추억은 무엇보다도 커다란 보물이다. 나는 모든 크기의 보물을 가지고 있다. 보물들 덕분에 나는 더 씩씩한 인간이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게 글이 아니면 뭐가 되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