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리에 붙어있는 머리카락조차도.
나는 내 랜턴을 던져버렸고, 이제 어둠을 볼 수 있다.
웬델 베리, <오래된 언덕>
*
몰랐는데 집 앞에 장례식장이 있었다.
요양병원 장례식장. 집에서 십분 아래에서 단정한 죽음 냄새가 난다. 불 때는 화로가 돌아가는 소리도.
여행에서 손톱깎이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긴 손톱을 하고 출근한다. 엊그제 깎아놓은 것 같은데 그새 너저분하게 길어져있다. 뼈처럼 단단하지도 않고 살처럼 말랑하지도 않은 것이 계속 자란다. 살아있다는 것은 세포가 자라다가 죽는 것을 반복하는 과정이라는 게 실감이 난다. 그렇게 각질이 쌓인다.
여행 내내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씨라 심장이 쑤실 만큼 멋진 풍경이었는데 막상 적으려고 보니 어떤 묘사도 생각나지 않는다. 예쁜 걸 보면 그 모습을 나의 언어로 기억하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이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 이제 생각을 언어로 변환할 힘이 없다. 번역기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용암이 멋지게 깎아놓은 현무암을 보면서 정말 끝내주는 광경이지만 내일 출근하면 모두 잊어버리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눈을 감았다 뜬 것처럼 눈앞에 있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이렇게 금방 잊기에는 참 아까운 모습인데. 이 귀한 순간을 공허하게 보내면 내일의 내가 많이 아쉬울 텐데. 다시는 이 공기를 느끼지 못할 텐데.
그리고 다 잊었다. 다람쥐가 알밤을 까먹은 것처럼.
출근도 괜찮고 출장도 괜찮다. 짜증스러워 미치겠지만 그래도 엄마라고 내가 부리는 패악을 받으면서 꾸역꾸역 옆에 붙어있는 가족도 괜찮다. 괜찮지 않은 건 나다. 이제 내가 쓰는 글도 재밌지 않다.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인간이 쓰는 그저 그렇고 지루한 글이다.
엄마가 너 죽으면 슬퍼할 부모를 생각해 보라는 말을 한다. 부모는 내 알바가 아니다. 당장 내가 안 힘들고 당장 내가 살고 싶었으면 좋겠다. 부모가 슬퍼해서 안 죽을 수 있는 삶이었다면 나는 진즉 신나게 죽었을 것이다. 꼴좋다, 어디 한번 직접 낳은 게 죽은 것 좀 보라지.
나는 내 삶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는다.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으니까. 내가 살고 싶어야 더 살 수 있다. 누가 슬퍼해서 안 죽을 수 있는 삶이면 아마 누군가 때문에 쉽게 죽어버릴 수도 있는 삶일 테니까.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를 찾고 있다. 글도 쓰기 싫고, 무료하고, 확신이 없고, 무엇도 아름답지도 즐겁지도 않은 일상에 내일을 더 마주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 중이다. 열심히 찾는 건 또 아니고, 슬렁슬렁 게으르게 찾는 시늉만 하고 있다. 보물 찾기를 언제까지 해야 마음 편하게 탈락자가 되는 걸까. 지금껏 충분히 재미있었는데 왜 더 살아야 할까. 나는 진짜 모르겠어. 뭘 해도 더 재미있을 것 같지가 않아. 랜턴을 들고 있어도 던져버려도 똑같은 어둠이다. 지금 내 뇌는 언어를 사용할 만한 힘도 없는데, 빛 한줄기 간신히 내는 랜턴을 들고 있을 만한 악력이 손목으로 들어갈 리가 없다. 던진 게 아니라, 무거워서 떨어뜨렸다. 건전지와 전선이 빼곡히 들어간 캠핑도구가 아니었어도, 새끼손가락만 한 몽당 촛불이었어도 떨어뜨렸을 것이다. 모든 것이 무겁다. 정수리에 붙어있는 머리카락도, 등 뒤에 얹힌 청남방도, 회사 옥상 위에 덮여있는 비구름도 다 무겁다. 경주의 예쁜 바다에서 오억년전과 똑같이 푸르고 아름다울 바다만 생각하고 싶다. 내가 그 속에 있는 미생물이라고 느끼고 싶다. 내키는 대로 파도도 되어보고 햇빛도 될 수 있게.
나는 왜 인간일까? 순진하게 궁금해진다. 아무도 대답 안 해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