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도 좀 벌릴게요
시간의 흐름이 완만했다. 발걸음을 재촉해도, 한발 한발 고요함의 수렁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이대로 시간의 흐름이, 흘러가는 걸 알 수 없을 만큼 느려진다면-, 죽음은 시간이 멈추고 이 공간에 혼자 남겨지는 걸까・・・・・・공간과 내가 사라지고, 시간만 흐르게 되는 걸까・・・・・・고이치는 어디로 갔을까・・・・・・더 이상 아무 데도 없는 걸까・・・・・・
유미리, <우에노역 공원 출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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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하루하루가 바쁘다. 날씨도 좋아서 돌아다니기에 나쁘지도 않다. 어제는 채 다 보지 못한 아니쉬 카푸어의 전시를 마저 보고, 경복궁을 산책하고, 경복궁 안에 있는 국립 민속 박물관을 갔다가 뮤지컬까지 본 후에 집에 왔다. 러닝타임이 150분이라는 것만 생각했는데 마지막 공연이라 배우들의 인사까지 끝나고 나니 세 시간이 지나있었다. 집에 와서 영화 한 편 보고 자려던 계획은 어림도 없었다. 잠이 안 와서 한참을 뒤척거리다 세시가 넘어서 잠들었다.
오늘은 도배를 한다고 작업하는 분들이 아침 일곱 시에 왔다. 알람을 맞춰놨다고는 하지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이층을 내어드리고 일층 빈백에서 두 시간을 더 잤다.
오후에 건강검진이 있다는 걸 깜박해서 든든하게 먹어두질 않았더니 근 28시간 공복이다. 그런데 허기가 지지 않는다. 지금도 그렇다.
회사가 지원해 주는 건강검진은 처음이다. MRI, 초음파, 뭐 이것저것 해서 50만 원어치를 공짜로 할 수 있다라지만 난 건강검진이 싫다. 해가 갈수록 더 싫어진다. 검진 내내 브래지어를 할 수 없는 게 정말 별로다. 유두가 어디 쓸리는 것도 싫고, 자극에 툭 튀어나오는 것도 싫어서 집에서도 절대 브래지어를 벗지 않는데 남들 나 돌아다니는 병원에 젖꼭지를 세우고 돌아다니자니 짜증이 팍팍 난다. 하필 지금 유대인 작가인 프리모 레비의 수용소 시절 책을 읽고 있어서 그런가. 다들 똑같은 가운을 입은 채로 간호사들이 시키는 대로 벗고 입고 눕고 뒤집고 하는 내 모습이 꼴 보기 싫다. 글에서 이렇게 싫다는 말을 많이 하게 될 줄이야.
회사가 돈을 내준다니 가슴을 죽 당겨 납작하게 누르는 유방암 검사도 하고, 몸 곳곳에 영화에서나 보던 기계를 연결하는 심전도 검사도 했다. 간호사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한다.
가슴을 다 보이게 펼치고 누우세요.
나는 싫어요,라고 말하지 못한다. 종이컵에 오줌을 받고, 상의를 벗었다 여미기를 반복하면서 나는 또 왜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한다. 초음파도 방사선도 없었던 시절의 인간은 가만히 방에 누워서 모양도 모를 세포에게 공격당하고 패배하고 그렇게 죽어갔을 텐데 지금의 인간은 돈을 무기로 질병과 싸운다. 나는 돈도 없고 기력도 없다. 내 몸이 나보다 먼저 살아가기를 포기했다면 나는 그냥 그 뜻에 따라주고 싶다. 이렇게 고기처럼 물건처럼 비참하게 속옷도 없이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젖꼭지 사정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진짜 거지 같은 것은 자궁경부암 검사다. 검사 항목이 워낙 많아서 느지막이 하겠거니 했는데 배에 바른 초음파 젤을 닦더니 곧장 여성진료실에 넣어졌다. 어정쩡 들어가서 팬티를 벗고, 바지를 벗고 치마로 갈아입었다가 가죽 의자에 엉덩이를 죽 빼고 앉아서 다리를 벌린다.
다리를
벌린다.
그러고 있다가 여의사가 들어오고, 내 다리 사이에 얼굴을 들이밀면서 말하는 것이다.
좀 벌릴게요.
활짝 벌리고 있는데 거기서 또 벌린단다.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들어가 허벅지를 모았다. 종아리를 걸친 거치대에서 덜컹 소리가 난다. 간호사가 당황한 얼굴로 묻는다.
자궁경부암 진단 동의서 작성하셨나요?
(하기는 했죠. 공짜니까.)
검사를 받을 의향이 있으신가요?
(필요성은 느끼고 있어요. 하기 싫을 뿐.)
검사를 받을 의향은 있는데 몸이 안 따라준다. 몇 년을 안 써먹은 곳을 누가 와서 헤집는다는데 좋을 건 또 뭐야. 여의사가 잠시 방을 나가고, 나는 말한다. 검사 맨 마지막에 와도 될까요?
나 참.
건강검진을 하다 보면 왜 이렇게까지 해서 더 살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온갖 기계에 넣고 굴려지면서, 보이지 않는 몸속을 걱정하면서 인간은 왜 삶에 붙어있으려고 하는 건지. 하지만 내 앞으로 줄줄이 들어놓은 보험들을 보면 내가 죽을 길도 쉽지는 않아 보인다. 검사가 끝나면 아래가 쑤셔진 화를 풀려고 맥주를 궤짝으로 두고 마시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또 사랑니를 빼고 왔다. 그것도 오른쪽 위아래 두 개나. 맥주는커녕 어제 사온 매운 김밥도 못 먹게 됐다. 이렇게 되면 강제로 50시간 공복이다. 입을 벌리고 싶지가 않다. 빼야지 빼야지 하고 벼르던 것의 반을 훅 처리하니 속 시원하긴 하다만 마취가 풀리는 한 시간 뒤면 나는 고통에 몸부림치게 될 것이다. 그때즘이면 상담센터에 앉아 심리상담을 하고 있겠지.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말하고 있는 내 모습이 눈에 훤하다.
요즘은 참 살아야 할 이유보다 죽고 싶은 계기를 마주치는 게 더 쉽다는 걸 느껴요. 오늘은 자궁경부암 검진을 받기 싫어서 또 얼른 죽고 싶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럼 선생님은 뭐 하고 할까. 또 상담시간을 늘려주실까.
오늘은 유방암 검사 말고도 인생 처음으로 한 게 또 있다. 수면 대장내시경이다. 약이 들어가자마자 잠드는 것도 모르고 푹 잤다. 어쩐지 현실과 이어지는 포근하고 좋은 꿈도 꾼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계속 자고 싶었다. 아주 깊은 곳에서 신나게 허우적거리며 그 잠에서 나오고 싶지 않아서 길을 찾았던 것 같다. 그냥 깨지 않고 싶어서.
수면 마취 때문에 알딸딸하니 좋았던 기분은 발치용 잇몸 마취가 다 몰아냈다. 지금은 치과 진료 영수증과 피맛나는 솜덩이밖에 남지 않았다. 맥주도 못 마시고 깨물지도 못하는데 먹태깡이 궁금해서 집 오는 길에 온갖 편의점을 뒤졌다. 이따 상담가는 길에도 다 찔러봐야지. 자궁경부암 진단 경부 내 세포를 채취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는 게 어이가 없다. 과학이니 신기술이니 들썩들썩한 세상에 자궁만큼은 아직도 흑사병이 돌 때나 쓸법한 방법이 전부라니. 남성 피임약도 없고, 생리통 무통제도 없고, 후유증 없는 임신도 없다.
역시 다시 잠들고 싶다. 이제부터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수면 내시경이다. 다음번엔 그때 꾸었던 단 꿈을 꼭 기억하기로. 내가 깨어나든 깨어나지 않든.
꼭 다시 잠들어서 행복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