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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Apr 04. 2021

0. 이 모든 것을 글로 써야겠다

바텐더로 일하려고 싱가포르에 왔다




싱가포르에서 근무를 시작한 지 삼 개월이 지났다. 요 근래 일터에서 크게 스트레스를 받는 바람에 도무지 글을 쓸 기운이 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상식과 현실의 오차범위에 시달리고 사람에 치여 일이 끝나면 곤죽이 된 채로 잠이 들었다. 내 생활이 엉망진창이라고 생각했다. 이 타지에서 나를 견디게 해주었던 독서와 글쓰기가 단 하나도 뜻대로 되지 않다니. 읽고 있는 책은 재미가 없고 기력도 기운도 나지 않는다. '글을 쓰자'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몸이 축 늘어진다. 한국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마치 한국에 가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는 듯이. 누누이 하는 생각이지만 나는 벌써 스물여덟이다. 도망치려고 나라를 건너다니기엔 부끄러운 나이다. 스물둘, 스물셋이면 성큼 비행기를 끊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애매하게 견딜 수도 있고 합의도 가능한 나이가 되어버렸다. 이 애매한 할 수 있음이, 정말 사람을 미치게 한다. 결단코 못하겠다는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이 기분이 끔찍하게 싫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이것 역시 글을 쓸 소재인 것이다. 내가 지금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어떤 생각에 빠져있는지, 어떻게 스스로를 돌아보고 있는지.


나는 글을 쓸 수 있고, 바텐더 일을 하고 있다. 모던바나 토킹바의 여성이 아닌, 생소한 클래식 바 문화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했던 여성 바텐더다. 누군가는 알아줄 수도 있지 않을까. 바텐더 앞에 '여성'이 붙는 채로 살아가는 것이 이렇게나 불편사항이 커다란 일인 것을. 단순히 '바텐더'라고 불리기엔 누구도 나를 성별을 제외한 채로 생각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어딜 가던 나는 여성으로 먼저 인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것은 기묘한 기분이다. 다른 남성 바텐더들도 이러한 기분을 느낄지 궁금하다. 남성이 가진 권력이란 어디까지일까.



나는 이상한 곳에서 일하고 있다. 싱가포르에 오고 나서부터, 그리고 글을 쓰지 않은 이번 주 사이에 할 말이 정말 많이 생겼다. 어디 풀어놓지 않고서는 답답하고 서러운 일들, 그리고 누군가의 의견을 듣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은 일들이. 고민의 끝은 어디에도 악인은 없다는 것이다. 사장님들이 사장님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강구한 것이 이렇게나 불쾌한 결과로 내게 돌아왔다면, 바다를 건너 쉬이 그만둘 수도 없는 나는 어떻게 주관을 잃지 않고 적응할 수 있을까.



나는 이상한 곳에서 일하고 있다. 바텐더로서 내가 가장 멀어지고 싶었던, 끊임없이 도망쳐왔던 것들이 바로 눈 앞에 쏟아지고 있다. 지난 며칠은 한 치 앞이 아득했다. 자책도 했고 욕도 했다. 결국 아무것도 변하는 것은 없다. 나는 이 직장에 8개월을 더 다녀야 하고, 도피는 막연한 이야기다. 그래서 글을 써보려고 한다. 내가 어떻게 싱가포르에 오게 되었는지, 한국에서의 직장과는 어떻게 다른지, 얼마나 허황된 것을 기대했는지, 그리고 그것들은 타인에게 얼마나 부질없는 것들이었는지.



나는 여자 바텐더다.



그냥 바텐더도 아니고 여자 바텐더다. 때때로 이 사실은 나를 아주 힘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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