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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Apr 06. 2021

01. 당신을 뭘 보고 믿어

매니저는 허울 좋은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들이에요. 내가 보증할게요.”



남자는 인조적인 느낌이 풍기는 희한한 인상이었다. 키가 크고 훤칠한 것이 흔히들 말하는 미남형 얼굴이었는데 영 정감이 가지 않았다. 첫 만남에서 나에게 말하는 단어 하나하나를 조심해서 선택하는 것이 보였다. 타인의 비위를 맞추는 것에 능한 편이었지만 자칫 가식으로 비칠 만큼 겉핥기의 공감이었다. 뒤돌아서면 손바닥 뒤집듯이 얼굴이 바뀔 사람. 그래도 표면적으로나마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익숙하고 유연하게 대처할 정도는 될법한 상사. ‘나를 믿고 따라와요’라는 말에는 하나도 신뢰가 가지 않았지만, 나는 이 정도의 대화 수준이면 크게 곤혹을 치를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본인의 분신 같은 사람이라도 말하는 사장님이 부디 이 사람보다는 깊이가 있기를 바라며 나는 말했다. 데려가 달라고. 열심히 하겠다고.


‘말도 얼굴처럼 번지르르하게 하네.’ 매니저가 될 사람을 처음 보고 한 생각이었다.



눈 앞에 앉아있는 장신의 남자와 그 남자가 보여주는 자신감, 조심스러움이 내가 볼 수 있는 전부였다. 세 번에 걸친 면접을 보았지만 내가 싱가포르에서 일하게 될 바에 대해 알 수 있었던 것은 극히 적었다. 사장님은 칵테일과 위스키에 대해 전혀 모른다, 전에 일하던 직원이 한 달 만에 그만두었다,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좋은 분들이다. 이 정도뿐. 비행기를 타고 날아갈 각오를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그리고 빈약한 설명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다를 건넜다. 이직을 준비하던 와중에 코로나 상황이 심각해졌고 바들이 9시에 칼같이 문을 닫으며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에서 유감스러운 통보를 받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한 달이 넘게 무력하게 고여있던 나는 해외취업에 대한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뒤에 따라오는 결과가 어떻게 되던지 감내할 수 있을 만큼 뼈가 굳었다고도 생각했다. 사람들을 한두 번 만난 것도 아니고, 바에서 하루 이틀 일 한 것도 아니고. 아무리 큰 일 이래 봐야 뭐가 있겠어. 무엇보다 매니저로 일하게 될 남자의 화술이 나쁘지 않았다. 대화만 통하면 사람 사는 일에 해결 못할 것이 뭐가 있을까. 후회하기엔 이미 늦었지만 그때부터 남자의 태도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결과는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나는 사장님들과의 접선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이런 시대에 화상 면접은 흔한 일이니 예비 직원과 영상통화라도, 그것도 곤란하면 전화 한 통이라도 해보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매니저는 그때마다 형이랑 누나는 자기를 믿는다며, 제가 마음에 든다고 했으니 그런 것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런 것이 필요한 것은 정작 나였는데 이 쪽은 이미 고려대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통화를 연결하면 내가 결정을 바꿀 수도 있다는 고차원적인 생각에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번거로운 절차를 최대한 줄이고 안 그래도 가게일로 바쁜 사장님들을 귀찮게 하기 싫었겠지. 나는 사장님 둘의 얼굴도, 이름도, 목소리도, 영업 방침과 지향점도 모르는 채로 출국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마 그때의 심정이라면 사장님들을 보았더라도 어떻게든 한국을 떠나려고 했을 것이다. 호주로의 출국도, 일본으로의 워킹홀리데이도 모두 좌절된 시점에서 코로나가 터진 한국은 비정규직 바텐더에게 너무나 끔찍한 환경이었다. 다 내가 한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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