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인 Nov 18. 2024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이 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세상 속에서


해인이 아주 좋아하는 꽃


하지만 나는 내 몸을 한시도 잊지 못했다. 이 몸에서 도망갈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도망갈 수 있는지도 몰랐고 이 세상은 언제나 나에게 그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록산 게이, <헝거>


*

아이고 죽겠다. 몸이 아프니 머리 위가 다 무겁다. 축축 늘어지고 바닥에 깔아져있고만 싶다. 컨디션만 보면 어제보다 훨씬 나은데도 어딘가 몽롱한 게 언제라도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상태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글로벌 행사도 준비해야 하고 할당된 지역을 돌아야 하고. 하필 처음으로 호텔에서 진행하는 행사를 앞두고 감기에 걸렸다. 그래도 코로나가 아닌 게 어디야, 그게 또 어디야.


행사를 같이 준비 중인 동료는 여자친구와 헤어졌다가 약 6개월 만에 새 애인이 생겼다. 6년 가까이 연애를 하고 있지 않은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사랑을 하는 건지 신기할 따름이다.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이 정도 살아보고서 느끼는 건 같은 것에 분노하고 같은 것에 행복해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기적 같고 불가능한 일인 줄 안다.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다름과 개성을 이해하면서도 이제는 나 아닌 다른 것들을 무조건 적으로 수용할만한 여유가 없다. 그래서 나 아닌 사람은 영원히 타인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나에게 연인은 늘 나의 반쪽처럼 나를 생각해 주고 그의 반쪽처럼 내가 의지한 사람이었다. 지금보다 어릴 때의 나는 모든 것이 하늘과 땅 차이인 생판 남을 내 영역에 받아들이고 참아낼 수 있었다. 어쩌면 사회가 젊은이들의 연애사업에 혈안이 되어있어 나 역시 그 일부가 되었다는 안정감을 느끼기 위해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런 시간이 있어서 듬뿍 사랑을 받아보았고 누군가 옆에 있는 기쁨도 누렸다. 내 연애는 그 나이 그 시절에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것 나쁜 것이 다 있는 전형적인 풋사랑이었다. 지금 나는 그때와 많이 달라졌고 사랑을 한다 해도 그때와 같은 태도가 아닐 것이다. 당연하게도.


사랑을 할 수 있을까?

굳이 말하면 별로 사랑을 하고 싶지 않다. 누군가를 그렇게까지 좋아해 본 사람으로서, 나 아닌 타인에게 과도하게 감정을 쏟아내는 것은 오히려 나에게 약점이 될 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내가 아닌 다른 인간을 조금도 믿지 않는다. 내가 사랑한 사람이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 내가 사랑한 사람이 도덕적으로 나와 같은 가치관을 공유할 거라는 생각,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 역시 그러하듯 나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리라는 생각이 헛되게 느껴진다. 사람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점점 더 탁하게 변해가고 있다. 성별 인종 나이 상관없이 가면이 없으면 모든 것이 껄끄러운 세상이다.


사랑을 할 수 있을까?

하루에도 칵테일을 여덟 잔 이상씩 꼬박꼬박 마시고 다니는 나는 대학 연합 동아리의 약물강간과 마약유통에 대해 보도하는 뉴스를 보며 상상을 멈출 수가 없다. 내가 친한 사람이 건넨 주스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따라준 술에, 내 자리에 놓여있던 물컵에 마약이 들어있고 그걸 마신 내가 고개를 꾸벅거리고 정신을 잃는다면 누군가 나를 옆방으로 옮기고 옷을 벗겨 강간을 하는 상상을. 누군가와 행복하고 즐겁고 싶었던 마음이 어디까지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지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집단 강간이 아닌 마약 난교행각으로 보도하는 언론까지도.

그렇게 돌아다니는 것들은 길에 돌아다니는 여성의 몸이 얼마나 가벼워 보일까. 무슨 옷을 입고 어떤 얼굴을 하고 있든 물 한 컵 주스 한잔을 들려주기만 하면 곧 흐물흐물한 반시체가 되어 옷을 벗기고 강간할 수 있는 성인용품이나 다름이 없는데.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받고 있는 취급일 텐데. 지금까지 내가 받아 마셨던 수잔의 물에 악의가 없는 걸 감사해야 하면서 살아야 하는 인생에 사랑?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불법촬영이 혐오스러워 바지를 입고 속바지를 입었더니 화장실 벽에 뚫린 무수한 구멍을 마주하는 세상이다. 나에게 물을 따라주고 칵테일을 만들어주는 바텐더들이 멀쩡한 정신머리를 가지고 있기를 빌어야 하는 세상이다. 그 사이에 누군가는 주스를 마시고 마약을 투여받고 정신을 잃은 사이에 강간당한다. 사랑?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


나는 조심하는 것에 지쳤다. 데이트 폭력을 당할 여지를 주지 않는 것에, 고백을 안전하게 거절하는 것에, 스토킹에 노출되지 않는 것에, 창녀와 나는 다른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밤늦게 다니지 않는 것에, 호신용품을 주렁주렁 챙겨 다니는 것에, 매일 성범죄 뉴스에 노출되는 것에, 집단적으로 범죄의 대상이 되는 성별에 속해있는 것에 지쳤다.

그래서 나는 내가 포기할 수 있는 것으로 나를 지키기로 했다. 여성으로 태어난 몸은 어떻게 해도 버릴 수가 없으니, 나 아닌 다른 것들을 사랑하려는 시도를 그만두기로 했다. 뭔가를 사랑하지 않는 세상은 생각보다 안전하고 평온하다. 이상적인 고립이다. 누구도 나를 침범하지 않는 요지부동의 작은 섬이다. 나는 누구에게도 설득되지 않고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냥 나인채로 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이 몸에서 도망갈 수도 없이 세상이 여성을 대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면 나 외에 그 무엇도 사랑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철저하고 조용하게 멸종을 바란다. 오늘도 내가 마실 물과 칵테일 한잔에 정신을 잃지 않을지 걱정하게 만드는 세상 따위는.

아직 순진과 순수를 두른 어린 여성들이 무엇보다 낚기 쉬운 먹잇감으로 보이는 이깟 세상 따위는.





매거진의 이전글 알고 있었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