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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Apr 22. 2021

04. 당신은 나를 어디에 데려다 놓은 거지?

면접 때는 이런 가게일 거라는 말 없었잖아




허먼 멜빌, <모비 딕> 121장 중


내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럼 어떻다는 거지? 내 몸도 그때와는 얼마쯤 달라졌는데, 왜 내 마음은 달라지면 안 되지?



*



처음 출근한 직장은 나쁘지 않았다.

 

무턱대고 날아온 곳 치고는 직원들은 화목했고 바 구색도 어느 정도 갖춰져 있었으며 캐주얼한 분위기가 적응하기 편했다. 며칠 동안 나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신나게 일을 했다. 막 자가격리가 끝난 상태가 이야기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고, 무엇보다 오랜만에 바 안에 서있는 그 기분이 못 견디게 좋아서. 흥에 겨울 수록 사장님과 손님들은 나를 더 귀여워했다. 바 안에서 앞에 앉은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것. 좋은 에너지를 주는 것. 그 재능 하나로 오 년을 일해온 바닥이다. 한국에서 만년 막내였던 때와는 다르게 바텐더가 나 하나뿐이라 칵테일의 제조도 맡을 수 있었다. 주류 발주와 재고 체크도 내가 했다. 늘 상사들이 나서서 해주던 일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니 내심 뿌듯해졌다. 나와 같이 있던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기까지 했다. 보세요. 저 이제 칵테일도 만들고 발주도 할 수 있어요! 한국에 가면 예전보다 더 도움이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때의 나는 이곳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것에 진심으로 행복했고 들어오는 손님들이 모두 반가웠고 싱가포르까지 온 나에게 자부심이 넘쳤다. 나는 썩 틀리지 않은 선택을 했다. 온갖 걱정을 짊어지고 왔지만 봐, 이보다 더 즐거울 수는 없어. 나는 행복해. 세상이 다 내 것인 것 같아.


그렇게 일하던 차였다. 주 5일 근무로 편의를 봐준다면 2년까지도 일할 수 있을 것 같다고까지 생각하던 때. 얼핏 지나가는 말로 여직원이 하나 들어온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일을 도와주는 파트타이머가 여럿 있기는 했지만 정직원은 부족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나보다 나잇대가 높고, 굉장한 미인이라고. 곧 자가격리가 끝나면 보게 될 거라고. 그분은 바텐더가 아니라서 바 안에는 들어오지 않겠지만 가게의 다른 부분을 관리하게 될 거라고 했다. 그 말에 나는 들떴다. 매니저님이 한 분 더 들어오나 봐. 손발이 잘 맞아야 할 텐데.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이야기 나눌 상대가 있으면 일하는 게 더 재미있어지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드디어 만나게 된 그분은


속이 비치는 블라우스에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낮은 힐을 신고 있었다.


사장님은 통성명도 제대로 시켜주지 않았다. 인스타그램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눈부신 외모의 그 여성분은 곧바로 여사장의 손에 이끌려온 중년의 남자들과 함께 이층으로 올라갔다. 저 차림새로 어떻게 근무하려는 걸까 라는 생각도 들기 전이었다. 언제쯤 눈을 보면서 인사를 나눌 수 있을지 끈기 있게 기다렸지만 그 하루가 가도록 그 분과 내가 인사를 하게 되는 일은 없었다.


여사장은 그분을 남자 손님 한 명 한 명 앞에 데리고 다니며 새로 온 직원이라고 소개했다. 그런 미인이 다소곳이 옆자리에 앉아 위스키를 따라주고 술을 받기도 하는 것이 나에게는 처음 있는 광경이었다. 지금 새로 들어온 직원이 하는 일이라는 게.


예쁜 옷을 입고 절세미인의 얼굴을 하고 남성이 시킨 위스키를 홀짝홀짝 같이 비워주는 것.

서툰 영어로 그들의 안부를 물어보며 미소를 짓는 것.


새로 들어온 직원은 그런 쪽을 ‘관리’하는 거였다.


한국에서 나를 데려온 매니저에게 물었다.


“저분은 뭘 하는 분인가요?”


그가 대답했다.


“이 층에서 손님들 접객할 사람이에요.”



내가 일하게 된 가게에서 입사 후에 어떤 언질도 없이 남성 손님들의 접객을 위한 여성을 고용했다.

속이 매스꺼웠다. 뭔가 일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저분은 이층에만 있을 거니까 해인 씨는 신경 안 써도 돼요.”



그럼 어떻다는 거지? 내 몸도 그때와는 얼마쯤 달라졌는데, 왜 내 마음은 달라지면 안 되지? 당신들은 지금 나를 어디에 데려다 놓은 거지?




단단히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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