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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Apr 29. 2021

아주 광활하고, 아주 위험한

글이 잘 써지는 시간의 꿈 일기






그는 요란하고 격렬한 꿈에서 빠르게 깼다. 꿈은 즉시 사라졌고 게리온은 잠자리에 누운 채로

부지런한 새벽 원숭이들이

마호가니 나무를 오르내리며 서로 꼬드기고 괴롭히는 웅장하고 신비로운

하데스 협곡의 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 외침이 그의 작은 상처들을 지워주었다. 게리온은 바로 이 시간에

영혼의 흡입 밸브가 너무 많이 열려 있는

깨어 있음과 수면 사이의 흐릿한 상태에서 자서전을 기획하는 걸 좋아했다.


앤 카슨, <빨강의 자서전> 중




*



글이 잘 써지는 날이 있고, 글이 잘 써지는 시간이 있고, 글이 잘 써지는 기분이 있다.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은 내가 읽어본 것 중 가장 전위적인 신화의 변환이었으며 작가 특유의 시 형식 서술도 몹시 강렬한 책이었다. 신화 속의 괴물, 추한 날개 한쌍이 달린 빨갛고 못생긴 소년 게리온.

게리온은 바로 이 시간에

영혼의 흡입 밸브가 너무 많이 열려 있는

깨어 있음과 수면 사이의 흐릿한 상태에서

글을 쓰기 위한 생각을 한다.


나는 눈을 감으면 곧장 꿈속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온 베개를 문대며 뒤척이고, 자세를 이리저리 바꾸기도 하고, 바디필로우를 무릎 아래 놓았다 옆구리에 끼웠다 하며 먼지를 일으킨다. 나는 자기 전에 꼭 안대를 쓰는 습관이 있는데, 아직 잠 기운이 충분히 몸을 덮치지 않았을 때 눈 위를 안대로 덮어놓으면 그렇게 이런저런 쓰고픈 것들이 생각이 나는 것이다. 안대라는 것은 또 ‘자고야 말 것이다’라는 생각의 구현 같은 법이라 한번 써놓으면 도무지 벗고 싶지가 않다. 그런데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잡생각들 중 그럴듯한 문장이 튀어나오면 핸드폰 불빛으로 오만상을 쓰면서도 메모장을 켜게 되는 것이다. 슬프게도 그것은 나의 고단한 밤에 꽤 자주 있는 일이다. 안대를 썼다가 짜증 내며 위로 추켜올리고 더듬더듬 핸드폰 자판을 누르는 일. 다시 잠에 드려는데 딱 이거 한 문장만 써놓고 자자, 해서 또 안대를 벗어버리는 그런 일.


희한스러운 꿈을 꾸다 슬핏 깼을 때도 핸드폰을 찾아들고 흔적을 남긴다. 게리온이 글을 쓰는 생각을 하는 시간, 깨어 있지도 잠들어 있는 채도 아닌 그런 상태에서.


오늘은 한국에 있는 바텐더 선배들의 꿈을 꿨다. 잠깐 잠실에서 같이 일했던 쾌남 사수 G. 나를 클래식 바의 세계로 인도해준 거나 마찬가지인 대선배 S. S의 아끼는 후배이자 늘 다정한 칵테일 전문가 J. 오랜만에 그 사람들과 S의 고급 승용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는 꿈이었다. 우리는 바다 근처를 향해 달렸다. 차에서 내리고 민박을 찾아가는데 G가 이 근처에 좋은 곳이 있다며 나를 데리고 어떤 카페에 들어갔다. 인테리어가 되다 만듯한 카페 내부는 음료를 주문하는 손님들로 북적거렸지만 당최 어디가 좋은 곳이라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의아해하는 얼굴의 나를 보고 G가 앞장선다.


나를 따라와요. 그냥 잠자코 따라와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걸 보여줄게요.


G를 따라서 계단을 끝까지 올라가자 학교의 옥상 같은 철문이 나왔다. 내 등을 떠밀며 G가 또 말한다.


문을 열어요.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바다였다. 한 겹의 유리창도 시멘트 바닥도 없는, 같은 공간 속에 나를 압도하듯이 펼쳐진 바다. 하늘도 바다도 색이 너무 진한 나머지 온 사방이 소다맛이 나는 그림책 같은 바다. 하늘 구석에 종이처럼 접힌 부분이 보였다. 오른쪽, 왼쪽, 가운데, 내 등짝까지. 네모로 거대하게 접어놓은 바닷물에 방생된 물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갈매기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파도소리와 짠 내음이 꿈속을 매운다. 내 뒤를 따라 들어온 G가 자신만만하게 웃는다.


봐요, 좋아할 거라 그랬죠? 바다 좋아한다고 했었잖아요. 실컷 봐요, 넘칠 때까지.


맞다. 나는 바다를 좋아한다. 꿈이라 그런지 공간감각이 엉망이었다. 내가 서있는 바닥이 해먹같이 쫀쫀한 그물망으로 되어있어서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몸이 휘청거렸다. 몸이 휘청이면 코앞의 바다가 그보다 더 가까워졌다. 금방이라도 풍덩 빠져버릴 것만 같다. 순식간에 파도 속으로 날름 감겨들어갈 것만 같다. 오른쪽, 왼쪽, 가운데, 내 등 쪽의 바다까지 한 바퀴 빙 둘러다 보았다. 눈을 뜨고 나서도 시야가 아릿할 정도의 군청색 바다. 사막 한가운데서도 느낄 수 있을 소금기 섞인 바람 냄새. 간밤의 꿈에서 나는 바다를 갔다 왔다. 꿈에서 깨고 나서도 한참을 멍하게 누워있을 만큼 진하고 깊은 바다를.



G에게 그대의 꿈을 꾸었노라고 오랜만에 안부나 전할까 하다가 어쩐지 무안스러워 그만 두었다. G는 꿈속에서도 똑같았다. 사랑스럽게 당당하고 건방지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기억해준다. 그는 지금도 내가 한국에 가면 내가 제일 좋아할 만한 칵테일을 만들어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꿈속에서 언제부터인가 사라져 있던 S와 J도 잘 있을까. S선배는 벌써 을지로와 명동에 번듯한 클래식 바의 사장이 되었다. 을지로점은 뺀질나게 드나들었지만 명동점은 아직 가보지 못했다. S선배의 안목이라면 새로 오픈한 가게도 근방을 주름잡는 훌륭한 바가 될 것이다. J가 S 가게의 일을 도와줄 때 그가 만든 칵테일을 먹으러 찾아갔었다. J도 S도 여전히 멋있는 사람이다.


잡소리가 자꾸 길어진다. 그런 시간이다. 게리온이 말한 시간. 졸리면서도 자고 싶지 않고, 아직 완전히 잠이 들기는 아쉬운, 글을 쓰는 생각을 하는 시간. 그때 남겨놓은 꿈 일기를 그만큼 몽롱할 때 다시 정리해 쓰고 있는 하루의 끝.


저 긴긴 꿈에 잠에서 덜 깬 내가 남긴 메모는 고작 두 줄이었다. 두 줄만 보아도 나는 지난밤 내가 꾼 모든 파랑들을 끌어올 수 있다. 바다, 바다, 그리운 바다. 그리고 내 꿈.

글이 잘 써지는 시간이다.

글이 잘 써지는 밤이다.

글이 잘 써지는 기분이다.

나는 곧 잠이 들 것이다.





잠결에 내가 남긴 메모 :


G 씨와 미칠 듯이 아름다운 오션뷰의 카페를 가는 꿈을 꿨다. 아주 광활하고, 아주 위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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