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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Jun 08. 2021

08. 정말로 모르고 있었니?

여기가 이런 곳이라는 것을.




사장은 자신의 가게를 ‘코리안 바’라고 소개하고 다녔다.

매니저는 나에게 '우리는 해외에 나와있으니까’ 한국에서 일하던 곳과는 당연히 차이가 있을 거라며 그것에 적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바는 나에게 끔찍한 곳이었다. 20년은 지난 한국 가수들의 R&B나 기계음 가득한 아이돌 노래를 틀어두고,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손님에게 시발놈, 시발년. 미친. 죽어 등을 가르치며 낄낄대는 곳. 장난이랍시고 사장이나 매니저나 하루에도 열댓 번씩 개새끼야, 를 외치는 곳. 세상에 들을 수 있는 형님 소리를 다 들을 수 있었다. ‘제가 제일 존경하는 형님인데요.’를 사람을 바꿔가며 말하며, 손님 앞에서 손님의 등급을 나누는 꼴이라니. 오빠 소리와 형님 소리, 허세와 겉치레가 난무했다.

그곳은 ‘코리안 바’가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그런 바는 본 적도 없고 일 해 본 적도 없던 나로서는 손님들에게 한국의 모든 바가 이곳과 같으리라는 불명예를 안길까 봐 조마조마했다. 매니저의 말처럼 정말 싱가포르에는 이런 바 밖에 없는 걸까, 이 곳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가게였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나는 다른 바에 손님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은 멋졌고, 전문적이었고, 정중했으며 품위 있는 곳이었다. 칵테일의 맛과 직원의 서비스가 탁월했던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숨이 쉬어졌다. 내가 몸을 담았던 곳에, 이상한 곳에서 일하기 시작하며 꾸역꾸역 막혀가던 공기구멍이 뻥하고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싱가포르의 바 문화는 눈부실 정도였다. 매니저가 자신들의 무례와 저열을 ‘해외에 나왔으니까’ 당연히 생각하라던 말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 내가 알고 일했던 바와, 사장과 매니저가 보고 들은 바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내가 사랑하는 바에는 근처도 갈 생각이 없다는 것도.

내로라하는 바 여러 군데를 다녀온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바텐더로서 이 나라에서 바 문화를 경험해보고 다른 바텐더들을 사귈 수 있다는 것 만으로 굉장한 일이다. 이 정도의 저급함은 참을 수 있었다. 이것도 가게 분위기라고 생각하면 되고, 사장들의 행태를 손님들이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 하나만 비속어를 쓰지 않아도 되는 문제니까. 그래서 1년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키지 않고, 탐탁지 않지만 바다 건너까지 온 마당에 이 정도 수준이면 수지 타산이 얼추 맞을 수도 있다고. 위층에 여자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일하는 동료로 포주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때의 나는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바로 공격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마귀같은 상태였다. 쉬는 날에 칵테일 공부를 하러 돌아다닐 수도 없을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던 와중에, 기어코 일이 터졌다.


수탉이 열심히 도와주고 있다지만 일손은 여전히 부족했다. 가게가 계속 바빠져 하루가 갈수록 진이 빠졌다. 여느 때처럼 오픈을 하고 있던 날, 가게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이목구비가 또렷한 미인이었다. 용건을 물어보니 오늘 하루 일을 도와주러 온 사람이라고 했다. 자연스러운 단발머리에 보는 사람도 시원한 민소매 원피스. 목부터 쇄골을 지나 팔을 덮은 문신이 원피스의 끈 사이로 드러나보였다. 나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수탉이 부른 아가씨들 중 가장 나중에 온 사람이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머리 색깔이 다양하지도, 높은 힐을 신지도 않아 눈에 띄었던 사람.

나는 물을 따라주고 손님 응대를 알려주었다. 손님이 들어오면 인사하고, 메뉴판 주고, 기본 스낵 조금 담아서 나가면 돼요. 아, 메뉴판은 이쪽에 있어요. 잔을 씻으면 여기에 말려두고 냉장고에 걸린 리넨으로 닦아주면 되구요. 콜린스 잔은 여기에 있어요...

그리고 손님이 들어왔다. 친구처럼 편하게 지내던 변호사였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보관해두었던 위스키를 꺼내며 잔을 준비해 주는데 그녀가 당연하다는 듯이 손님의 옆으로 가더니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녀가 나에게 말한다.


"나도 얼음잔 하나만 줄래요?"


그렇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나와 같은 바텐더 일이나 가게를 나간 직원들과 같은 일을 하려고 온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는 매니저의 앞에 서서 물었다. 벌써 몇 번째 하는 질문인지 모르겠다.


"오늘 오신 분이 하는 일은 뭔가요."


"응? 위층에 00 씨가 하는 거 있잖아. 일층에서 손님들 접객할 거야."


이층에 있는, 나와는 아직까지 통성명을 하지 못한 그 여자의 일을 일 층에서 해주려고 온 사람. 내가 그 일을 하지 않아서, 어쩌면 나 대신. 피가 발바닥에서부터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숨을 고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 달 전에 접객여성 00 씨가 들어왔을 때, 나는 알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층은 내 관할도 아니고, 이 가게에 그만큼이나 마음을 써가며 언쟁을 할 의욕도 나지 않아서. 매니저의 말마따나 이층은 저 여성분한테 맡긴 채 신경을 끄고 살면 그 공간이 나에게 아득히 먼 곳이 될 줄 알았다. 위에서 옷을 입든 벗든 더듬고 뒹굴든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었다. 그건 가게를 꾸려나갈 사장들이 조절해야 하는 문제니까. 그런데 지금 이게 뭐야.  자칭 ‘코리안 바’라는 곳에서 벌어지는 추접스러운 일이 어느새 이층 계단을 타고 내려와 내 눈 앞에 앉아 있었다. 내가 엊그제까지만 해도 퍽 즐겁게 이야기 나누던 손님의 옆자리에, 너무 예쁜 얼굴을 하고 이렇게 떡하니.


화가 치밀어 올라 사고가 정상적으로 되지 않았다. 나도 알고 있었다. 세상 어딘가에서는 지저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내가 보지 않으려고 마주치지 않으려고 뒤를 돌아도 그것들은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는 걸. 오늘 일을 도와주러 온 사람은 전혀 상관없었다. 그녀는 매끄럽게 본인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 뿐이다. 내게 뒤통수를 날린 것은 이런 식의 영업방침으로 가게를 운영하면서도 타국에서 진행된 면접에 전혀 언급이 없었던 것과, 달라져 가는 가게의 방향성에 대해 직원에게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사장과 매니저의 행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기준에서는 유흥주점과 다를 바가 없는 그런 풍경들이 그들에게는 화기애애한 친목질 정도로만 인식 된다는 것이. 내가 알았던 상식은 이곳에서 무용지물이었다. 한국에 처를 두고 온 유부남들이 당연하게 소개팅 애플리케이션을 깔아놓고 매번 다른 여성을 데리고 들어오는 곳. 집에서 딸자식이 기다리지만 하룻밤 같이 보낼 여자를 낚으려고 앉아있는 곳. 단골손님이 마음에 든다고 말하면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먹여 같은 테이블로 밀어 넣어주는 곳. 전부 역겹다고 생각했지만 모르는 척 했다. 쓰레기장 같은 곳에 날파리들이 꼬이는구나 하고 눈을 돌렸다. 하지만 지금 내 눈 앞에서 또래로 보이는 여성이 나이가 두배는 많을 남성 손님에게 술을 따라주는 광경은 정말 구역질이 나는 것이었다.

나는 매니저에게 말했다. 분노 때문에 목소리가 떨렸다.


"매니저님. 저와 한국에서 면접을 볼 때, 여기가 여자가 술을 마셔주는, ‘이런 가게’ 일 거라는 걸 알고 계셨나요? 모르고 계셨나요? 저는 제가 일하게 될 곳이 ‘이런’ 곳인 줄 알았으면 결단코 오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당연히 이곳은 지금까지 제가 일해왔던 곳과는 느낌이 많이 다른 곳이고, 그래도 이 곳에 스스로를 맞춰볼 생각으로 적응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가게의 방향이 달라지는 게 보이니 저로서는 굉장히 당황스럽습니다. 00님이 오셨을 때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이층에서 뭘 하던 제 눈에 안 보이면 될 일이고, 사장님이 하겠다는 일인데 어쩌겠어요. 그런데 이제 일층까지 사람을 부르시나요? 이런 일을 하는 직원이 더 늘어날 예정인가요? 제가 왜 여성이 남자 고객을 접객하는 바에서 여자 바텐더로 일해야 하나요? 저는 지금 굉장히 모욕적이고 치욕스러워요. 부끄러워서 어디 나가서 여기서 일했다고 말할 수 도 없을 정도예요. 저는 제가 일하는 업장에 대한 자부심을 원동력으로 일하는 사람인데, 여기는 도저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매니저님. 제가 일하게 될 가게가 이런 곳이라는 걸, 매니저님은 알고 계셨나요?"




머릿속은 한가지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역시 당신을 믿는게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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