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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Aug 20. 2021

09. 첫 번째 전쟁은 이렇게 끝났다

당신들은 나를 잘못 뽑았어





세계에 관한 보어의 이해를 -그의 철학적 기본 태도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올바른 주장의 반대는 틀린 주장이다. 하지만 심오한 진리의 반대는 또한 심오한 진리일 수 있다."


에른스트 페터 피셔, <슈뢰딩거의 고양이> 중



*



매니저는 몰랐다고 말했다. 이런 곳인 줄 몰랐다고, 여성 직원이 접대하는 곳인 줄 미리 알았다면 한국에서의 면접에서 분명히 언급해 주었을 거라고. 그리고 코로나와 여타 상황으로 죽어가는 가게를 살리기 위해 궁리한 방법에 내가 이렇게나 반발하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다는 말도 했다.


“본인은 본인이 하던 일 계속해요. 저 사람들은 자기 일 하게 두고. 우리가 뭐 가게에서 이상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그렇게 화 낼 일인가? 나는 모르겠네. 해인 씨한테 손님 옆에 앉으라고 한 거 아니잖아.”


귀찮은 듯 대화를 끝내려는 대답에 나는 더 항의할 수 없었다. 이 남자는 지금 내가 느끼는 혼란을 화두로 쳐주지도 않고 있었다. 매니저는 내가 일하는 가게에 여성 접대부가 들어왔다는 것에서 엉겨 붙는 불쾌감을 끝끝내 모를 것이고 알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 내가 당신을 뭘 보고 믿었을까. 한국에서 봤던 뺀질한 얼굴에 그나마 대화가 통하리라 기대했던 나의 안일함에 이렇게 뒤통수를 맞는다.

나 역시 전혀 호의적이지 않은 태도로 갈무리를 지었다.


"가게에 지장 안 가게 저한테 주어진 일만 할게요. 제가 여기에서 해드릴 수 있는 건 그게 다 인 것 같네요."


매니저는 그러라고 했다.



그날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곧 졸도할 것처럼 멍한 머리로 휘청거리며 근무했을 것이다. 내 앞에 앉았던 아가씨는 천사 같은 미소로 하루 일당을 다 채우고 이 테이블 저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술을 마셨다. 대여섯 시간의 근무에 대략 삼십만 원 정도를 버는 천사. 후에 나는 이 사람을 평생 잊지 못하게 된다.





매니저와 아무 소득 없는 논쟁을 한 이후로 나는 대놓고 반항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사장 내외에게는 냉랭하게 대했고 사무적인 말 이외에는 농담도 받아주지 않았으며 형식적인 인사만 하는 식이었다. 나는 매니저에게 말한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또렷하게 기준을 세워두었다. 바텐더로서 사고 안치고 가게를 굴러가게만 만들어두면 되는 거였다. 술을 주문하고 재고를 기록하고 과일을 다듬었다. 손님에게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만큼의 서비스를 제공했다. 근무 시간 내에 업장 이탈이나 휴대폰 등을 하지 않았다. 사장의 철 지난 개그에 웃어주거나 이전처럼 손님들에게 살갑게 구는 것은 더 이상 내가 할 일에 해당되지 않았다. 나는 온몸으로 '당신들은 나를 잘못 뽑았다'를 말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일하기 싫다고, 끔찍하다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나를 놓아달라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 이때의 내가 참 철딱서니 없고 무모해 보인다. 내가 당신들을 섣불리 믿어서 잘못된 선택을 한 건 맞는데, 당신들도 무턱대고 뽑은 내가 얼마나 반항질을 할 수 있는지 보라는 식의 자존심 싸움. 꼴 보기 싫으면 알아서 계약을 파기하고 한국으로 돌려다 놓으라는 일종의 시위였다. 심지어 나는 그나마 친해진 손님들에게도 가게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영업방침이 이런 데인 줄 몰랐다, 나는 지금 매우 힘들고 화가 나있는 상태며 한국에 갈 기회만 엿보고 있다 등등. 그 얘기를 듣는 손님들도 분명 가시방석이었을 것이다. 힘든 상황에서 경솔하게 내린 결정의 결과는 나에게 이렇게 돌아왔다. 절대, 절대 남의 말을 함부로 믿지 말라는 교훈과 함께.


접객 여성을 앞에 두고 본인은 본인의 일을 하라는 말. 손님 중 아무도 나에게 옆에 앉으라고 하지 않을 거라는 말. 이상한 짓 하는 것도 아니지 않냐는 말. 나에게는 이 모든 것이 딴 세상 같았다. 아니, 정말로 다른 세상이 맞았을 것이다. 사장과 매니저의 인생에서는 별것 아닌 것들이 내 삶에선 찰나의 예시로도 등장하지 않을 만큼 저속하고 상스러운 거였으니. 그런 것들이 갑작스럽게 사방에서 튀어나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발을 디딘 곳은 내가 살던 세계가 아니었다. 어긋난 시각, 이상한 기준, 모호한 윤리관을 가지고 있었다. 말문을 틀만한 상식조차 없음에 나는 숨이 막혔고, 직설적으로 반항했다. 쌍방 과실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여기 있는 게 못 견디게 끔찍스러우니, 저들도 티끌만큼의 성가심을 느끼기를 원했다. 손님 앞에서 가게 험담을 멈추지 않았다. 숨기지도 않았다. 사장은 그런 나를 신경 쓰지 않았고, 그저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당연한 일인 것이 그들도 거금을 주고 데려온 나를 손해 보며 놓치기 싫었을 것이다. 배 째라 싶었다. 그 정도로 나는 남의 속을 긁는데 자신이 있었다.


그때 한국에서 전화가 오지 않았더라면.



전화에서 들려오는 M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울컥한 심정이 북받쳐 올랐다. 그간에 있었던 이야기와, 지금 내가 얼마나 이상한 곳에서 일하고 있는지를 떨리는 목소리로 전했다. 갓난쟁이 사회인이었던 나를 어엿한 서비스맨으로 만들어준 사람.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 내심 토닥여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동정해주기를, 나를 가엾이 여겨주기를. 심심한 위로를 전해주기를. 하지만 M은 늘 이성적이다. 올바른 주장의 반대편은 틀린 주장이겠지만, 아쉽게도 내가 한 주장은 심오한 쪽이었나 보다. 평생 직원만 해 본 나는 사장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사장인 M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속상한 것도, 화가 나는 것도 이해는 하지만 사장이 직원 면접을 볼 때 자기가 생각한 가게의 콘셉트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사장과 직원의 업무와 직책은 엄연히 다른 것이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것은 사장의 관할이라 직원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가게의 콘셉트가 뭐가 됐든 사장의 기준에서 따로 고지를 해야 할 만큼 대수로운 게 아니었다면 지금 내가 펄펄 뛰는 것은 그저 사람 사이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가치관의 차이라는 거다. 내가 남성 바텐더였거나, 요즘 이슈인 여성인권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상황은 서로에게 아무런 갈등 없이 지나갔을 거라면서. 일하면서 생기는 변수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고, 나의 기준과 잣대로 사장에게도 권리를 주장하면 그것은 되려 돈을 주는 사람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나는 한국에서부터 싱가포르의 바텐더 평균 급여에 비해 높은 금액을 제시받았고, 자가격리 비용과 비행기 삯까지 지원받았다. 사장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후한 대접을 해주고 있는 것인데 나는 '여자가 손님과 같이 술을 마셔주는' 가게라는 것을 말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혼자 당황스러운 시위를 하고 있는 거였다. 사장은 심성이 모난 사람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면 나와는 맞지 않는 사람일 뿐이다. 내가 한 것들이 어리석은 행동 같았다. 유치 찬란하게 내 시선이 세상의 진리라고 믿는 옹고집을 애꿎은 곳에서 부리고 있었다. M의 말이 맞았다. 바람직하고 현명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사장의 입장에서 문란해지지 않는 선에 한해 여직원을 고용하는 것은 일시적으로나마 가게 매출에 도움이 된다. 가게는 불건전하다고 하기에는 콕 집어 말할 구석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곳이 내가 지금껏 일해오던 '바'와 같은 곳은 절대 아니었다. 그것은 사장의 잘못도, 내 잘못도 아나라는 것을 화에 눈이 멀어 놓치고 있었다. 복어처럼 땡땡하게 품고 있던 독이 스르르 녹아 없어졌다. 누가 뭐라 해도 나에게 월급을 주는 사람이고 내가 계약서에 서명한 사람이다. 나 역시 사장이라는 명칭에 따른 존중을 갖춰야 하는 거였는데 상식과 기준을 빌미로 무의식 중에 사장 내외를 무시하고 있던 것이 이렇게 터지고 만 것이다. 나는 반성했다. M이 하는 얘기는 다 맞는 말 같았다. 다음날 나는 더 상쾌하게 출근할 수 있었다. 표정은 점점 밝아졌고, 눈치를 충분히 살핀 사장은 내게 독대를 신청했다. 사장과 매니저와의 삼자대면에 나는 천사가 출근한 날부터 일주일 동안 내가 느꼈던 감정을 고스란히 말했고 M과의 통화 후에 느낀것들도 전달했다. 사장은 사과했다. 그는 힘든 상황에 버텨보고자 선택했던 방식이 여자인 나를 불쾌하게 할 줄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당장 가게의 방향성을 바꿀 순 없겠지만 접객 여성과 나의 분할은 더없이 뚜렷하게 할 것이며, 행여 손님이 나에게 불편한 상황을 요구한다면 주저 없이 제재해 줄 것을 약속했다. 모두가 만족스럽게 대화는 마무리되었고 나는 뒤에서 한층 어른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상정해 본 적 없는 '사장'의 입장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직원으로서의 내가 얼마나 건방지고 콧대 높은 지도 깨닫게 되었다. 스스로의 성깔머리에 교정이 필요해 보였다. 새삼 나 같은 직원을 데리고 오래 가게를 꾸려나간 M이 대단해 보였다.


내면에 휘몰아쳤던 폭풍 같은 첫 번째 전쟁은 이렇게 평화적으로 끝이 났다. 비겁할 만큼 분명하고도 불확정적인 경험이었다. 첫 문장에서 에른스트 페터 피셔가 보여주었던, 덴마크 물리학자 닐스 보어의 진리를 절절히 통감하며.


"올바른 주장의 반대는 틀린 주장이다. 하지만 심오한 진리의 반대는 또한 심오한 진리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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