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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Aug 25. 2021

10. 수탉의 여자들

나는 그 애들과 달라?




내 영혼이 일러주었네.


나는 난쟁이보다 크지 않고,

거인보다 더 작지 않음을.


나는 모든 사람들이 만들어지던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졌음을.


-칼릴 지브란



신경숙, <외딴 방> 중





*


수탉의 여자들.

나는 그녀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하는 것은 그저 추측이다. 불손하고 무례한, 경험해보지 못한 분야를 바라보는 편견 투성이 억측.


수탉의 집에는 방 둘에 화장실이 하나라고 했다. 큰 방을 아가씨 네 명이 쓰고 작은 방을 아가씨 둘이서 쓴다. 수탉은 집 거실 구석에 그가 좋아하는 건담 프라모델 사이에서 구겨져 잔다. 수탉은 가끔 전화를 받고 피곤한 담임 선생님 같은 얼굴로 가게를 뛰쳐나갔다. 다녀와서 무슨 일이었냐고 물어보면 스트레스와 성격을 못 이겨 육탄전을 벌이는 아가씨들을 중재하고 왔다고 말했다. 어리고 샘 많은 아이들을 한 곳에 몰아놓으면 그런 싸움이 꽤 자주 있는 일인 듯했다. 다음 날 출근해야 하는 애 머리끄덩이를 쥐어뜯고 얼굴에 주먹질을 해서 곤혹스러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수탉은 아가씨들의 예쁜 얼굴과 마르고 하얀 몸을 아낀다. 수탉은 아가씨들의 스케줄을 관리한다.


수탉의 집에 살면 방세가 들지 않는다고 했다. 분명히 취업비자로 입국을 했을 텐데 어디서 어떻게 비자를 받았는지도 궁금한 일이다. 나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날 하루 가게에서 일했던 언니의 근황을 물어보면 수탉은 씩 웃으며

“Reservation full. Buy out.”이라고 했다.

예약이 꽉 차서 다음 주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었다.  바이아웃, 바이아웃. 그녀는 팔렸다. 그녀의 시간은 돈으로 잴 수 있다. 한 시간에 사백 불.


나는 생각했다. 뒤틀리고 멀미날 것 같은 기분으로, 내가 마주한 상황이 나에게 불쾌한 이유가 뭘까. 이렇게까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그쪽을 쳐다도 보지 못할 것은 또 왜일까, 하고.

여자가 남자와 이야기를 나눠주고 돈을 받는다. 술을 같이 마시며 바틀을 하나 더 구매하기를 부추긴다. 많이 웃고 비위를 맞춘다. 여자들의 옷은 짧고 추워 보인다. 어두운 조명 아래서도 아이들은 성의를 다해 화장을 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근처에도 가지 않았으니 들리는 게 있을 리가. 내 머릿속에서는 온갖 음담패설이 떠돌아다니고 있었지만 그들이 막상 한 것은 소소한 일터나 가정에 대한 대화였을 것이다. 수탉의 여자들. 나는 이 사람들이 일하는 것을 보면서 왜 거북살스러워야 했을까.


어쩌면 나는 수탉이 데리고 있던 아가씨들이 가진 여성의 얼굴을 부끄러워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왜 부끄러운 것이 되어야 했을까. 나 자신이 지켜온 가치관과 도덕성이 부정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나는 남자와 웃어주는 것 만으로, 남자의 옆에 앉아서 술을 마셔주는 것 만으로 '착석 바'의 이미지를 떠올렸고 그것은 지금껀 내가 입사를 지원했던 한국의 수많은 모던바와 같은 선상이었다. 터치와 2차 요구가 없으면 그것은 건전한 바 문화인가? 여성 직원의 유니폼이 원피스에 치마 정장이라면 그것은 바에서 무슨 의미인가? 나에게는 모던바의 여자들도 창녀와 다를 바 없는 부류였다. 한 시간에 삼만 원이라는 시급에 홀려 나방처럼 날아온, 시간과 가치 비용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노동보다 꾸밈을 좋아하는 여자들. 다른 여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남초가 이끌어가는 여성 멸시적 사회의 편견과 혐오를 조장하는 여성들. 중요한 것은 나는 그 사람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업무 시간의 특성상 이런 그림은 종종 있었다. 회사원이 퇴근하고 9시가 넘은 늦은 밤에 건물 화장실에서 나란히 손을 씻는 여자 둘은  한 명은 오센틱 클래식 바, 한 명은 세 칸 옆 '루비'라는 모던바에서 일하는 바텐더다. 클래식 바 바텐더는 흰 셔츠에 멜빵, 검은 정장 바지에 에나멜 구두를 신고 긴 머리를 한 갈래로 묶어 넘겼다. 그 옆에 여자는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에 고데기로 볼륨을 주고 하얀 홀터넥 스타일 블라우스와 허리를 꽉 조인 소라색 미니스커트, 6cm 오픈토 힐을 신고 있다. 그녀는 아마 앉아서 일을 할 것이다. 그런 신발을 신고서는 한 시간도 서있을 수 없을 테니까. 나는 먼저 나가는 그 여자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보고 있었다. 얼핏 거울에 비친 얼굴이 얼마나 공들여 화장을 하고 얼마나 지쳐 보였는지도. 여자는 그 시간에 나와 같은 성별의 화장실에서 만난 것을 불편해하는 눈치였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앉아서 웃어주고 술 따라주면서 편하게 돈 벌겠군. 저런 모던 바들 때문에 우리 가게는 <여자 접대부 없음, 클래식 바>라는 팻말을 문 앞에다 걸어놨는데.'

그렇다. 나는 그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다. 그게 당연한 거였다.


나에게 언니, 하고 반갑게 인사하는 앳된 얼굴들, 명품 지갑에 수줍게 자랑하고 싶어 하는 입술. 그 애들을 나는 창녀라고 부를 수 있나? 아니, 이 아이들이 행여 몸을 파는 일을 하더라도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내가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게 애들을 물건처럼 사고파는 수탉과 손님들의 행태였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일하고 있는 아이들도 눈을 마주치기 힘들어졌다. 나라면 저런 일을 안 했을 텐데. 저 애들은 부모님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나. 하는 치졸한 생각이 불쑥불쑥 쳐들어 올랐다.


이쯤에서 솔직해져야겠다. 나는 필사적으로 바 밖에서 손님과 앉아있는 아가씨들과 바 안에서 일하는 나를 분리하려 했다. 옷차림, 외모, 화장, 말투, 영어 실력, 전문적인 태도. 그런데 그들이 하는 일은 내가 상상해온 것처럼 그렇게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손님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하며 웃어주고, 같이 술을 마시고, 종국엔 매출을 올리고. 옷차림, 외모, 전문성 외에는, 바 안이 아니라 바 밖에 있다는 것 말고는 내 일과 차이가 없어 보였다. 지금까지 자긍심을 꾹꾹 눌러 담아서 일해온 바텐더라는 나의 직업이, 시간당 사백 불 받고 일하는 아가씨들과 하는 일이 다를 바가 없다니! 용납할 수 없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불쾌했다. 저 애들이 하는 일은 나와 달라야 했다. 같은 공간에서 이렇게까지 차이가 없어선 안 되는 거였다. 엄밀히 말하면 그날 내 몸은 말도 안 되게 편할 정도였다. 그 애들이 내 몫만큼 손님과 대화하고, 웃고, 교감해 주는데 내가 할 일은 가끔 들어오는 칵테일과 위스키를 서브하는 것 밖에 없었다. 더 망연해졌다. 나의 일은 이렇게 쉽게 대체되고, 때와 공간에 따라 이리도 가벼워 보일 수 있는 일이었다.

술집 여자. 그 애들도 나도, 결국은 술집에서 일하는 술집 여자였다. 이 문장을 쓰면서 다시 좌절감을 느낀다. 나는 아직도 술집에서 일한다. '바'와 '술집'. '바텐더'와 '여직원'. 언어의 힘이 이렇게나 무섭다. 혼자서 온갖 절망을 하고 있던 나를 사로잡은 생각은 이거였다.


그 애들과 나는 달라.


다르다면 뭐가 다른가?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칵테일을 만들고 손님과 대화한다. 그 애들은 예쁘게 꾸미고 손님을 즐겁게 해 준다. 우리는 뭐가 다른가?


매니저에게 항변할 때 '이런 곳'에서 일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이런 곳'이란 '여자들' 즉 그 애들이 있는 공간을 뜻했다. 손님이 요구하는 방향성이 나와는 다른, 별개의 업무를 가진 접대용 여성 직원이 있는 곳. 도망치고 싶었다. 그곳에서 내가 가진 불분명한 직업성과, 그에 대비해 너무나 또렷한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나를 힘들게 했다. 수탉의 여자들과 친해지고 싶지도,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내 모습에 자괴와 환멸을 느꼈다. 내가 그녀들을 멋대로 재단하고 깔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들을 있는 그대로의 예쁜 모습으로 받아들일수록 점점 그녀들이 먹고 자는 방 사이에서 끼어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끔찍한 상상이었다. 내 생각보다 더럽게 놀지 않네. 그냥 이쁘장하고 노는 거 좋아하는 어린애들이네. 그렇게 생각할수록 내가 세워놓은 기준에 금이 갔다. 나는 그 기준이 없으면 바텐더를 할 수 없었다. 한국의 바들은 여자 바텐더에게 늘 바람처럼 유혹을 불어넣고 천금으로 손짓하는 곳이다. 전문성은 필요 없으니 봐줄 만한 얼굴과 웃음으로 들어오라고 말하는, 언제나 열려있는 꿈의 직장. 어리면 더 좋고.


나는 그 유혹의 무서움을 안다. 부유해 본 적이 없고 돈 욕심도 있어서 시급에 홀려 둘러보다가 간판을 보고 구역질이 나 돌아 나온 게 여러 번이다. 수탉의 여자들은 늘 내가 서있는 대척점에 있어야 했다. 그 경계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것이 처음이라 겁을 먹은 것이다. 마땅히 부도덕하고 낯가죽이 두꺼운 여자들이라고 손가락질해야 하는데, 그 해사하고 어린 얼굴들을 보면 말문이 막혔다. 손님들한테  할 때처럼 사근사근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내 눈을 볼때마다 그런 애들을 두고 이런 식으로 내 직업의 가치를 합리화하고 있는 꼴이 무안스러웠다. 혼란이다.

나는 수탉을 마음 놓고 증오하다가 그의 여자들을 만나자마자 얼어붙고 말았다. 그의 여자들까지 미워할 필요는 없었지만 딱히 좋아할 일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막상 보니 이렇게 싱그럽고 사랑스러울 일은 또 뭔가. 그 애들은 정말 한시간당 사백 불을 받고 좋은 끼니나 말동무가 되어주는 게 하는 일의 전부일까. 지금 코로나로 문을 닫았다던 수탉의 샵은 뭘 하는 곳일까. 어두울까, 형광 조명이 있을까, 뒤쪽에 은밀한 방이 있을까.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나는 내가 일하는 곳이 '이상한 곳'이 되어가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됐을까.

무구한 눈의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손님을 접객하는 것을 앞에 두고 나는 까무룩 가라앉는다. 혼란스러웠다. 지금까지는 세상이 여성과 나를 대상으로 기만하고 있는 줄만 알고 잔뜩 날을 세우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누구보다 여성을 기만하고 있는 건 내가 아닌가.


내가 아닌가.


혼란스러웠던 그 시간이 지나간 것이 나에게는 정말 다행인 일이고, 답 없는 질문이라도 그때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고뇌한 흔적에 안도한다.


나 역시도 더 어리고 예쁘고 욕심 많았던 나이에 수탉의 집에 살 수도 있었다.

그 애들과 내가 다를 건 없다.


지금도 수탉의 안방에서 옆 이불의 누군가를 한껏 견제하고 경쟁할 어리고 예쁜 여자아이들을 생각하며 처음에 적었던 문구를 다시 본다.



우리는 난쟁이보다 크지 않고,

거인보다 더 작지 않음을.


그저 모든 사람들이 만들어지던

똑같은 재료로 만들어졌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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