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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Jul 26. 2021

Bar-03. 술이 스스로 말할 때까지

나한테도 너희의 목소리를 들려줘

​​

엔젤스엔비 증류소의 상징, 천사 날개.


얼른 증류소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이런 문구가 적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때론 위스키가 자기 스스로 말하도록 놔두는 게 최선이다.”

그렇다. 위스키는 스스로 익어가고 결국 스스로 말한다. 아무리 세상이 발전해도 발효와 숙성의 신비로운 과정을 사람이 다 통제할 순 없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술을 빚은 뒤엔 그저 하늘에 맡겨둘 수밖에 없다. 위스키를 통해 또 한 가지를 배웠다. 세상은 순리대로 흘러간다는 것을. 또 그래야 가장 자연스럽다는 것을. 그것이 위스키는 뭐든 간에.


조승원, <버번위스키의 모든 것> 본문 중


​​​


*

작가가 엔젤스 엔비 증류소를 나오며 남긴 기록이다. 문장에서 운치가 줄줄 흐른다. 오 년 전에 맛봤던 천사의 날개를 가진 위스키도 떠오른다. 그 위스키는 이태원에서 폭발물처리반으로 일하고 있는 미군 친구의 귀중한 선물이었다.

당시 한국에 정식 수입이 되지 않았던 엔젤스 엔비는 그 해 먹은 것 중 유난히 기억에 남은 걸출한 녀석이었다. 투명한 바틀에 녹색의 모가지, 등짝에는 은은한 천사 날개가 그려져 있던 엔젤스 엔비. 첫 등장부터 심상치 않았다. 더글라스는 그 위스키를 시꺼먼 총기보관함에 넣어서 가지고 왔다.

어째 향기부터 끝 맛까지 범상치가 않더라니 수많은 명품 버번위스키를 만들어낸 장인이 직접 만든 증류소에서 나오는 제품이었다. 묵지근한 숙성에 스카치위스키처럼 피니시 공정까지 신경 써서 거쳤다.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 뭣도 모르고 홀짝홀짝 마셨던 술의 비밀을 이런 곳에서 다시 보게 되다니. 마시는 순간 거슬거리고 마초 같은 질감이 트레이드 마크인 버번위스키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풍미가 온 입안에 가득했다.(내가 마신 엔젤스 엔비는 라이 위스키였다.) 엔젤스 엔비는 말 그대로 천사가 실눈을 뜨고 노려보고 있는 듯한 물건이었다. 천사의 것에 손을 댄 느낌.

증류소들에는 저마다의 캐치프레이즈가 있다. ‘버번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린다’는 불렛, ‘사랑인가요 증오인가요’의 라프로익, ‘계속해서 걸어가라’의 조니 워커. 그중에서도 엔젤스 엔비 증류소의 문구는 유난히 한 편의 시 같다. 여러 위스키를 개발하고 성공시킨 마스터 디스틸러의 체념과 한숨이 섞인 것만 같은, 어딘가 달관한 듯한 한마디. 위스키가 위스키의 말을 가지게 내버려 두라는 것이 그가 증류소 벽에 새긴 문장이다. 최선은 늘 멀고도 가까운 곳에 있다. 올가미처럼 동그란 나머지 한쪽만 보면 한 번에 보이지 않는다. 할아버지와 아들 손자, 3대가 함께 힘들 모아 차린 증류소에는 연로한 마스터가 걸어온 장인의 세월이 느껴진다.

내일도 위스키의 말을 들으러 간다.

오늘 마신 위스키는 부드럽고 따스한 맛으로 말을 거는 녀석들이었다. 녹듀라는 작은 증류소에서 꿀과 같은 달콤함을 지닌, 오크통에서의 기다림이 혀 안을 굴러다니는 향기로운 친구들.

내일은 조금 더 사나운 녀석들을 상대로 골라봐야겠다. 오 년 전 마셨던 천사의 질투를 떠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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