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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Jul 27. 2021

Bar-04. 향기에 이끌린 것뿐인데

인생 최고의 선택일 줄은 몰랐지




미국 생물학자 로버트 더들리가 쓴 <술 취한 원숭이>라는 책에 따르면, 영장류와 인간의 후각이 발달하게 된 건 알코올 때문이라고 한다. 땅에 떨어져 자연 발효된 과일을 먹고 싶어 했던 원시인들이 코를 킁킁대며 알코올 냄새가 나는 곳을 찾다 보니 저절로 후각 능력이 진화했다는 거다. 그러니 증류소 숙성고에서 코를 킁킁대게 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수천수만 년 동안 알코올에 탐닉해온 인류가 대대로 이어온 DNA 때문이다.

조승원, <버번위스키의 모든 것> 중



*​

일주일에 한 번 쉬는 귀한 날에 위스키 공부를 하러 카페에 나왔다. 술을 좋아하는 분이 손님으로 오면 바 안에 서있는 게 무색할 정도로 일장연설을 들을 때가 있다. 이 술은 대형 00 회사 소속의 증류소에서 00번째 에디션으로 나온 술인데요 뭐 연식 증류 단식 증류 어쩌고저쩌고. 생산지 자체가 해외이다 보니 전 세계를 두루 돌아다니며 온갖 술을 맛 본 분들 앞에서는 입술에 꿀이라도 바른 것처럼 기가 죽는다. 공부를 해도 해도 몰랐던 정보들이 계속 어딘가에서 튀어나온다. 나는 그저 술병의 멋진 모양과 술의 향기에 끌려들어 온 것뿐인데.

사실 막입이라 테이스팅 노트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입에서는 진부한 수식어밖에 나오지 않는다. 보통 ‘, 이거 맛있어요!’ 정도. 혀에 닿는 느낌이 부드럽고 입천장까지 오르는 향이 풍부하며  넘김 후에도 진한 여운이 남는다. 이것을 맛있는 위스키, 좋은 위스키 말고 달리 무어라 표현할  있나. 하지만  모든 것을 쪼개고 나누어 목차별로 손님들에게 추천해주는 것이  직업이다. 오늘도 남이 맛본 희한스러운 노트들을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바닐라, 토피넛, 육두구, 계피, 캐러멜까지는 오케이. 크림 브륄레와 커스터드에서는 손가락이 멈칫멈칫한다. 40도짜리의 독주 어디에서 이런 향기가? 갈수록 가관이다. 코코넛, 키위, 파인애플까지 나왔다. 미간이 좁아들지 않을 수가 없다. 섬에서 나오는 위스키까지 흘러들어 가면 이제   편이 나올 지경이다. 바닷소금, 해안의 바위, 해초와  대양의 . 글은 쓰고  일이라더니 도저히 손님들한테  단어 그대로는 알려줄 수가 없다. 하나하나  혀로 다시 맛보고 조금  평범한 놈들로, 다시 말하면 한국식으로, 혹은 동양에 친숙한 것들로 바꿔야 한다.

지난주에는 세 가지가량의 입문에 좋은 위스키를 테이스팅 했다. 몸은 정말로 늘 변하고 있다. 나이 좀 먹고 위스키를 즐긴 시간이 이 정도 되니 확실히 전보다는 섬세하게 맛의 결이 나뉘는 게 느껴진다. 가게에는 그사이 네 종류의 위스키가 더 들어와 131가지의 술을 가지게 되었다. 맛볼 것이 127가지 남았다는 뜻이다.



내가 일하는 가게는 정면이  통창이다. 사각형의 공간에 2면이 통째로 바깥이 훤히 보이는 유리란 얘기다. 오후  시부터 근무를 시작하면 햇살이 쨍쨍한 시간인데,  시간에 위스키의 색이 가장 선명히 보인다. 쉐리와인에 숙성한 따스한 단풍색의 위스키, 포트와인에 숙성한 진한 포도즙 같은 색깔의 위스키, 오랫동안 통에 묵어 기름기를 듬뿍 머금은 황금과 꿀의 색까지. 일하는 곳이 아름답다. 눈이 부시다.

오픈한    달이  되는 곳이다 보니 아직 뜯지 못한 위스키들이  많다. 손님들의 성원에 힘입어 하루에도  위스키 서너 개는 따고 있는데 아직도 131가지를 전부 오픈하지 못했다. 위스키에는 에어링이 굳이 필요치 않다고 말은 하지만, 아무래도  열린 녀석보다 어느 정도 공기를 들이마신 것들이  부드럽기 마련이다. 대신 알루미늄 밀봉을 뜯어내고 처음 따르는 위스키에서 올라오는 위스키는 움트는 향이 기가 막히다. 바틀에서 지거까지, 지거에서 글라스까지 가는 짧은 시간에  주변에 자신의 향기를 풍겨놓는다. 마스크 아래서도 코가 발름거린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손님께 한마디 건네고 만다.


“세상에. 향이 정말 좋네요.”

내가 저렇게 말하면 잠시 동안 내 주변 동료와 손님들까지도 잠깐 손을 멈추고 숨을 들이쉰다. 갓 깨어난 위스키의 강렬하고 풍성한 향을 다 같이 들이마신다. 기분 좋아지는 순간이다.

지거에 남은 향기까지 움푹 들이마시며 딱 이런 느낌의 디퓨저가 있다면 몇 통이고 쟁여놓고 말겠다는 생각을 한다. 위스키 플레이버 디퓨저. 그중에서도 스코틀랜드 바다향기, 아니면 계곡 근처의 증류소 향기로.

<버번위스키의 모든 것>은 저번 주 토요일에 완독 했다. 버번위스키의 바이블로 둬도 좋을 정도로 작가가 다방면에서 심혈을 기울인 좋은 책이었다. 나 역시 매우 유익하게 읽었다. 읽는 내내 술이 당겨 곤혹스러웠던 것을 빼면.



술을 좋아하는 손님들이 좋다. 이제 나에게 술을 빼면 무슨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모르겠다. 술에 붙은 라벨이 예뻐 바에 들어왔다가 술이 가진 향기에 퐁당 빠져버렸다. 한번 갈 때마다 돈 십이십은 우습게 깨지지만 없는 살림에도 끊임없이 바를 찾는 이유는 나처럼 술을 사랑하고 술에 흥미 있는 전문인과의 대화를 원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바텐더가 가난하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은 바텐더들이다. 바에 앉아서 ‘안녕하세요. 00동 000 바에서 일하는 바텐더 000입니다.’라고 소개하면 관심과 함께 과분한 애정이 쏟아진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요? 우리 손님도 그쪽 바를 알던데. 대표님은 잘 지내요? 등등 좁은 바 업계의 근황과 소식들을 한바탕 나누고 나서 진정한 음주 타임이 시작된다. 시킨 건 한잔인데 자꾸 조그만 술들이 줄줄이 따라 나온다.

‘그 위스키가 마음에 들면 이 것도 마셔봐요. 같은 방법으로 증류했는데 특이하게 부재료가 달라.’ 선배이자 전문인들의 단비 같은 지식들이 쏟아진다. 사랑스럽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반가워한다. 나는 꽤 귀여움을 받는 축이다.



가야 할 바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술의 향기도 하나 못 맡고 카페에 앉아 공부만 하고 있다. 그래도 지금 해놓는 것들이 후에 나를 더 부끄럽지 않게 만들어줄 것을 생각하면 조금 뿌듯하다. 내 바에 다른 바의 바텐더가 왔을 때 나도 똑같이 신나서 맞이해줄 수 있으리라고. 바텐더들은 알코올의 향기를 따라다닌다. 술 취한 원숭이, 아니 술을 좋아하는 원숭이들이다. 늘 술의 향기에 코를 킁킁대며 위스키 잔을 빛이 있는 방향으로 한 바퀴 굴린다. 입술을 오물거리며 향기를 오래 음미한다. 수천수만 년 동안의 본능을 그대로 가진 원숭이 무리들. 애주가 원숭이 바텐더들.

술향에 이끌리길 정말 잘했다. 이보다 행복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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