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인 Aug 18. 2021

Bar-05. 고마워요 하루키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




"아일레이에서는 술통이 숨을 쉬거든. 창고가 해변에 있어서 술통은 우기 동안 갯바람을 담뿍 머금지. 그리고 건기가 되면, 이번에는 위스키가 그걸 술통 속에서 흠뻑 빨아들이는 거야. 그런 과정을 반복하는 동안 아일레이의 독특하고 자연스러운 향이 생겨나고, 그 향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고 위로해 주는 거라네."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 여행>,

보모어 증류소 매니저 짐 맥퀴안과의 대화 중



보모어증류소의 책임자로 35년 동안 근무하던 짐 맥퀴안은 2001년 브룩라디 증류소로 직장을 옮겼다. 현재는 은퇴 후 새 아일라이 증류소 오픈을 준비중이라는 소문이 들리기도 하고.




바텐더들 사이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특히나 유명인이다. 그나마도 이름이 낯익은 작가 중에서 짧게라도 위스키에 대한 에세이를 낸 사람이기 때문이다. 손님들에게 말 한마디 더 걸기에 이보다 더 그럴듯한 주제는 없다. 저명한 일본 작가가 사랑한 아일라이 위스키들.

처음에 책을 펼쳐 들고 얼마나 실망스러웠는지 모른다. 수년의 경력 중에 지금에서야 이 책을 빌려온 나도 나지만, 큼지막한 폰트에 얇은 내용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여행 사진들. 그리고 술에 관심이 없는 것이 분명한 번역가의 서문 등이 읽기 전부터 나를 다소 김 빠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책에는 또 나름의 매력이 있다. 모두가 한 번씩 스쳐 지나갈 수 있는 가벼움, 부담스럽지 않은 애정과 운치. 어떻게 보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짧은 일정만큼이나 산뜻하기도 하다. 길지 않은 문장 속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들어있고, 그 사람은 위스키를 좋아한다. 마치 나처럼, 내가 만나고 싶은 손님들처럼. 글을 쓰는 사람이 위스키를 사랑하고 그에 대한 책을 냈다. 그가 유명해서 다행이다. 위스키를 마셔보지도 않은 번역가가 이 책을 펴내며 위스키가 궁금해지게 만들었다. 사춘기가 한참 지난 나는 이제 그의 책에서 외설과 허무주의가 아닌 다른 것을 느낄 수 없지만, 여전히 그는 멋진 작가다. 소소하게 먼 땅에서 감사의 말을 올린다. 그 덕분에 누군가 위스키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어준 것을.


들려오는 정보는 각기 다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좋아했던 위스키가 라프로익 이라느니, 보모어를  껍데기에 조르륵 흘려먹는 것을 강력하게 추천했다느니. 소문의 진상을 알아보려고 책장을 겼다. 들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놀랍도록 공평하게 아일라이 위스키에 애정을 표한다. 라프로익 위스키도 얼씨구나 맛이 있고, 보모어 위스키도 절씨구나 풍미가 좋다. 아일라이 섬의 훈연 향이 담뿍 들은 싱글 몰트 위스키라면 뭐든 석화 껍질에 적셔 마시기에 딱이다. 칭찬 일색이니 비로소 여행하는 느낌이 든다.  역시 내가 점찍어둔 장소나 나라를 탐방할  사방팔방이 어찌나 신기하고 어여쁘던지. 길가에 떨어진 개똥조차도 이국적으로 보였다. 꿈꾸었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발아래도 머리 위도 감격스럽고 새롭기만 , 문장이   없이 머릿속을 차고 넘쳐서 손에서 메모장을 놓을 수가 없는. 그런 벅참이 하루키의 책에서도 보인다. 그가 조금  어렸다면  격정적으로 아일라이 섬의 감탄스러움을 묘사할  있었을까. 하지만 그가 원숙하고 프로다운 작가였기에 이렇게 어정쩡하고 무료한, 그러나 매료되는 글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시종일관 뒷짐을 지고 걷는 것처럼 느긋하고 여유롭다. 구름이 많은 아일라이의 울적한 날씨에  어울리는 필체다. 일필휘지, 후루룩  내려가고 뒤돌아보지 않는다. 딱히 돌아볼 거리도 없다. 하루키가 설렁설렁 돌아다닌 기록일 뿐이니. 그는 어쩌면 위스키 자체보다 증류소의 거대함과 웅장함,  안에서 일하는 사람과의 독대를  즐거이 생각한  보이기도 한다. 조용한 사람이다. 대화하며 많은 생각을 하는, 그리고 아름다운 문장을 뽑아내는.


굉장히 흥미로웠던 것은 이 책이 '술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작정하고 만든' 지식 전달용 저서가 아니라 자신의 작품세계가 또렷한 사람이 '얼레벌레 술 가지고 여행기를 쓰게 된' 작품이라는 것이다. 초장부터 하루키는 하품을 쩍쩍하는 듯 심드렁한 태도를 보인다. 예찬하는 것 같으면서도 특유의 나른함으로 위스키 고장의 풍경과 역사를 기록한다. 이 정도의 의욕으로 책을 냈다는 것이 되려 하루키가 생각보다 위스키에 진심이었다는 근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무라카미 하루키와 아일라이 위스키에 대해서는 검색 첫 페이지만 보아도 자료가 넘친다. 한 문장, 혹은 책의 어느 부분만 떼어온  포스팅들은 작가의 이름을 각주로 달고 어딘가 무겁고 여운 있어 보인다. 막상 책을 펼치면 그저 '하루키, 유유자적 아일라이 섬에서의 하루' 정도라는 게 퍽 재미있다. 슴슴한 책에서 문장 하나를 쏙 뽑아오면 꽤 좋은 맛을 낼 것 같은 양념이 된다. 양념들만 콕콕 찍어먹다가 맹탕 같은 책에 홀랑 데어버린 것이 나다. 맹탕치고는 썩 나쁘지 않았지만.


실망했다고 말하기엔 애매한 것이, 일반 주류 서적에서는 찾을 수 없는 수려함이 있기 때문이다. 공기가 촉촉한 우기에 갯바람을 담뿍 머금는 오크통과, 메마른 건기에 술통 안의 위스키가 그 나무에 담긴 바다내음을 흠뻑 들이마신다는 내용의 인터뷰는 하루키가 아니면 차마 살리기 힘든 미문이 아닐까 싶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지나가게 두고 싶지 않은 문장들이 있다. 하루키는 위스키 증류소라는 투박한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시적으로 만든다. 하루키는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어느 곳에 넣어야 가슴을 울리는지 알고 있다. 적어도 그 공격이 나에게는 아주 잘 들어와 먹혔다.


책의 원제는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이다. 위스키의 향기를 옴폭 느끼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제목이니, 하루키가 고료를 받기 위해 겉핥기로 위스키를 팔아먹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위스키는 혓바닥으로 시향 하는 향수와 같고, 후각으로 노래하는 시와 같다. 끈적하게 떨어지는 한 방울 속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들어있는지 알면 지구 인류의 반은 놀라지 않을까. 나는 그런 것들에 둘러싸여 일하고 있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 여행은 내가 일하는 곳에 손님을 데려오는 마술피리다. 작가가 쓴 서정적이고 주관적인 감상들은 위스키의 때깔이 고와 보이게 만든다. 당연한 일이다. 위스키 전문 서적들이 이야기하는 맥아보리나, 증류소의 배양 효모와 당화 과정 같은 것들보다는 분명히  감성을 자극하는 구석이 있다. (특히나 건기에 들어가는 6-9월, 증류소에서 물을 많이 사용하면 유량이 줄어 산란기의 연어가 강을 타고 올라가지 못해 개점휴업이 들어간다는 등의 정보 같은 것은,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증류소 일꾼들이 집을 단장해 아일라이 섬의 마을 주택들은 늘 멀끔한 페인트칠을 유지한다는 것도 하루키가 아니면 적어두지 않았을 소소한 사랑스러움이다.) 손님들이 위스키를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다. 잘 디자인된 예쁜 바틀과 향긋한 한 방울의 가치를, 바텐더와 이야기 나누는 소소한 시간을 모두 좋아해 주었으면. 손님에게 하루키의 책처럼 다가가서 위스키 대백과처럼 펼쳐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한참 전문성에만 치중하는 독서를 하다가 갑자기 마주친 감성파 여행 에세이에 질투와 낯섦을 느껴버렸나 보다. 증류소를 여행하며 책을 내다니. 이렇게 짧고 간결한, 가슴이 간질 하게 여행을 부추기는 글을 쓰다니. 여러모로 샘을 내지 않을 수 없다. 위스키를 사랑하고 싶은 손님에게 한 번쯤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풍류를 즐기는 술꾼의 증류소 여행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 여행>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Bar-04. 향기에 이끌린 것뿐인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