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인 Aug 19. 2021

Bar-06. 혓바닥이 할 일이다

그것은 그저 취향이니까!




"그렇지. 머리로만 이러니 저러니 생각해선 안 되는 거야. 이런저런 설명은 필요 없어. 가격도 상관없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싱글 몰트는 햇수가 오래될수록 맛있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렇지 않아. 시간이 지나면서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이거든. 증류를 해서 더해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덜 해지는 것도 있어. 그건 다만 개성의 차이에 지나지 않아."


무라카미 하루키, <위스키 성지 여행>

라프로익 증류소의 매니저 이안 헨더슨과의 대화 중




스코틀랜드 아일레이 섬의 라프로익 증류소.




종종 손님 중에 위스키 라벨에 적힌 숫자를 물어보는 분들이 있다. 12년, 15년, 18년, 때로는 21년. 25년에 30년 까지. 늘 비슷한 말을 하긴 했지만 이 책을 읽은 후로는 대답이 한결 수월해졌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지요. 어릴 때의 내가 재기 발랄하고 모험심이 넘쳤지만 철이 없고 경솔했던 것처럼. 차츰 나이가 든 후에는 성숙하고 여유로워도 낡은 몸뚱이와 편협한 고집을 동반하듯이. 맞는 말이다. 그건 다만 개성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어쩐지 한국에서 위스키는 고가의, 사치스러운 술이라는 인식이 있는 듯 하다. 17도의 소주가 한 병에 삼천 원 정도라는 것을 생각하면 30미리에 만원 돈을 호가하는 위스키가 퍽 비싸게 느껴질 만도 하다. 그렇다면 위스키는 왜 비싼 걸까. 노란 액체가 찰랑이는 700미리 유리병에 무엇을 숨겼길래 금이라도 바른 듯한 가격인 걸까.

위스키 한 병에는 많은 전문가들의 손길이 들어있다. 타피오카를 팔팔 쪄낸 밑술을 연속식 증류기에 넣어 대량 생산하고 공장식 병입을 하는 한국의 시판 소주와는 비교하기 무안할 만큼의 정성이다. (물론 장인의 손길이 듬뿍 깃든 전통주와 세밀한 공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한국 증류식 소주와는 다른 별 이야기다) 위스키 증류소에서 최고급 맥아보리를 재배하기 위해 토지를 사는 것은 흔한 일이다. 물과 기후가 중요한 위스키의 생산과정은 가장 기본이 되는 재료, 맥아보리를 검열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요즘 같은 첨단 시대에 젖은 보리를 건조시키는 데도 사람이 직접 삽을 어깨에 지고 일정 시간마다 일일이 뒤집어주는 수작업을 하는 증류소가 꽤 많다. 그리고 마스터 블렌더의 혓바닥으로 수만 개의 배럴에서 숙성된 원액의 맛을 본다. 매해 일정한 풍미의 위스키가 판매될 수 있도록 10년부터 길게는 60년까지의 배럴에 숙성된 원액을 잘 조합하여 완벽한 한 병의 맛을 만들어낸다. 거기에 더해지는 끊임없는 노동력. 밀랍 봉인과 라벨 스티커를 수작업으로 진행하거나, 위스키를 숙성하는 오크통의 정렬 위치까지도 모두 사람의 손을 한번 거친다. 위스키 한 병을 생산하는 모든 전문가들의 뺨으로 떨어지는 땀방울을 하나하나 받으면 700미리의 병이 꼭 채워지지 않을까. 비싸기 때문에 싱글몰트 위스키인 것이 아니라, 싱글몰트 위스키이기 때문에 비싼 것이다. 일을 하면 급여를 받는 것처럼 좋은 재료를 쓴 음식에 적절한 비용이 따르는 것은 위스키의 세계에서도 똑같다. 위스키는 정말 훌륭한 식용 예술 작품 그 자체다. 천천히 한 잔을 비워갈 때 줄곧 입 안을 메우는 향기는 그 가치로 충분하다. 한 방울 한 방울이 아쉽고 아깝다.


나를 처음 업계에 끌어들였던 위스키 바틀의 찬란한 라벨들. 종이 스티커 주제에 앤틱하고 고풍스러운 폰트를 자랑하는 스카치위스키에는 두 자리 숫자들이 눈에 띈다. 글의 시작에 잠깐 언급했지만 눈을 반짝이며 물어보는 호기심 많은 분들이 있다. 12년 보다 비싼 15년, 15년 보다 비싼 18년. 그리고 입이 떡 벌어지는 가격의 25년. 연수가 높고 가격이 덩달아 따라 올라가면 그것은 세상 누구의 입에 들어가도 찰떡처럼 맛있을까요?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답니다. 모든 것은 그대의 혓바닥에 달렸어요.

연수가 높은 것은 비싸다.  이유  가장 먼저 손님께 소개하는 것은 희소성이다. 싱글몰트 위스키 바틀의 가슴에 12년이 쓰여있다면,  바틀은 세상에 나오기 위해 12 이상의 시간 여러 오크통 속에 담겨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12바틀을 다시 보게  날은   길어진다.  녀석이 아무리 보고 싶어도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인내심과 끈기가 없이 만들어진 위스키는 맛이 부유하고 실망스럽다. 참을성은 위스키에게도, 위스키를 마시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덕목이다.

두 번째 이유는 부드러움과 깊이 배여든 풍미다. 위스키와 소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원액을 숙성하는 오크통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나무통에서 옮아간 것들이 위스키의 색이 되고 향이 된다.(어떤 증류소에서는 캐러멜 색소를 넣어 색을 입히기도 하지만 그 점은 일단 차치하고 얘기한다) 그런 통 속에서 18년, 21년 심지어 30년을 머문 원액이라면 증류소가 성심성의껏 골라온 재료와 손길이 오크통 안에서 둥그레지고 유연해진다. 은은하고 부드러운, 증류주의 맛보다는 캐스크를 달여 만든 듯한 달달함과 함께. 순하디 순한 매끄러운 텍스처가 대부분이다. 뾰족한 부분 하나 없이 혀 끝부터 목 안까지 벨벳처럼 타고 넘는다. 이것은 마냥 좋기만 한 걸까?

모든 증류소는 옛적부터 고수하는 자기들 만의 방식이 있다. 오크통이라던가, 숙성 방식이라던가, 숙성고의 온도라던가, 그런 소소하고도 대단한 것들. 오랜 시간 잠을 자는 아이들은 이 모든 손길에서 홀로 성숙해진다. 눈을 꼭 감고 그슬린 나무 안쪽의 성분을 빨아들여 눅진하게 익어간다. 어쩌면 나무통의 향기를 지나치게 빨아들여 탄닌 특유의 떫은맛이 날지도 모른다. 알 속에서 잠을 자는 것들은 깨우기 전까지 어떻게 세상에 나올지 모르는 일이다. 증류소의 명맥상 먹지 못할 정도의 못난 맛을 낼리는 만무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개인적으로 사춘기를 갓 겪고 잇는 듯한 어린 년수의 위스키를 좋아하는 편이다. 성깔이 막 생겨 톡톡 튀는 개성들이 좋다. 여차하면 손을 써 볼 새도 없이 혀 위에서 피어오르는 증류소의 아이덴티티. 엔트리급에서만 볼 수 있는 또 다른 매력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훈연함을 특징으로 하는 아일라이 섬 위스키들 만큼 고연산 위스키가 밉상인 놈들은 흔치 않다. 코 끝과 입 안에서 폭탄처럼 터지는 매콤한 아궁이의 맛을 몇십 년 동안 오크통에 재워놓으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 한창때였던 모습을 떠나보내고 과거 회상이나 하는 노병을 보는 기분이다. 위스키는 늘 숫공작처럼 자신을 뽐내고 있다. 위스키가 한껏 치장하고 있는 향들을 코와 입과 눈을 활짝 연채로 느껴야 한다.


술을 마실 때는 눈으로 색을 보고 코로 향을 맡고 입술로 잔을 느끼고 혀로 맛을 보지만 그 과정에 오감 중 딱 하나 청각이 없어 서로의 잔을 부딪히는 소리에서 마지막 하나를 채워온다는 이야기를 보았다. 술을 마신다는 것은 곧 거대한 연극이요 자기 위로다. 우리는 이 시간을 즐겁게 사용할 권리가 있다. 오롯이 향긋하고 풍부하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는 말은 가끔은 거짓 명제다. 내가 일하는 바에 오는 손님은 맛있는 술과 함께 빠짐없이 행복해야 한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할 필요 없다. 동행한 일행과의 소소한 담소든, 앞에 선 촐싹 맞은 바텐더와의 대담이라도 상관없으니 부디 마구 행복하기만 한 밤을 보내고 가기를. 멋진 라프로익 증류소 관리인의 말마따나, 이런저런 생각 할 필요 없다. 연수 따위에 개의치 않고 여기 있는 바텐더가 맛있는 한 잔을 추천해 줄 것이다. 아무리 마셔보아도 어린 녀석이 영 성에 차지 않는다면 피치 못하게 고연산을 내밀어야 하겠지만 세상에는 오래 묵지 않아도 맛있는 위스키들이 너무나도 많다. 사랑에 빠질 때까지 찾아 헤매면 된다. 그것은 그저 취향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Bar-05. 고마워요 하루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