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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Aug 24. 2021

피는 힘보다 강하다

옥타비아 버틀러, <와일드 시드> 감상



사천여 년을 살아온 초인적 존재라는 설정은 우리의 일상적 경험을 아득히 넘어선다. 그럼에도 <와일드 시드>는 선명하고 깊은 고통과 절망을 지독하게 독자에게 전이한다. 상대의 굴복을 당연하게 여기는 강자의 존재, 이를 허락하는 인종차별과 노예제, 어디서나 이용당하는 가임여성, 너무나 쉽게 사라지는 생명, 더 고민하는 자가 더 약자가 되는 상황, 약자에게 최선의 길은 기껏해야 강자와의 타협 일지 모른다는 절망까지, <와일드 시드>는 아냥우의 삶은 현실 세계의 갈등과 비극을 담고 있다.


옥타비아 버틀러, <와일드 시드> 정소연 작가의 작품 소개 중 발췌




*


<킨>을 읽은 후로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을 섭렵하고 있다. 본 내용이 시작도 하기 전에 정소연 작가의 필력으로 펼쳐지는 작품 소개는 상상 이상으로 기상천외해서 도저히 기대를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다.

17세기 아프리카의 한 부족 마을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타인의 육체를 빼앗으며 약 삼천 칠백 년을 살아온 ‘도로’라는 별종과 오지에서 삼백여 년을 생존한 ‘아냥우’라는 흑인 여성이 등장인물이다. 주인공들의 나이에서 짐작하듯 이 이야기의 시간축은 일반적인 소설의 두세배 가량을 아우른다. 갈등과 도피의 기간 역시 삼백 년이 훌쩍 넘는, 나이 차이가 3400살이 넘는 불멸의 연인. 많은 시간을 담고 있어서일까. 이 이야기는 야만성과 모성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킨다. 아이를 낳는 여성의 역할과 씨를 뿌리고 일족을 만드는 남성의 역할이 덤덤하고 당연하게 묘사된다. ‘도로’는 가치 있는 능력을 가진 인간 남성체를 ‘종마’로 보고 교배 후에 우성 유전자인 아이를 낳을 법한 여성과 짝을 지어준다. 교미하여 자식을 얻지 않으면 무의미한 일이기에 그의 중매에는 목적성이 다분하다. 인간은 번성을 위한 씨앗이기 때문에 도로는 윤리와 감정을 신경 쓰지 않는다. 교배는 대부분 근친상간으로 이루어지고, 씨를 심거나 품을 수만 있다면 종마의 혼인 여부는 상관이 없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을 신으로 섬기고 제 가치를 증명해줄 일족이다.

도로는 제 씨가 깃든 인간들을 아들이며 딸, 증손자라고 부르고 그가 의도한 교접으로 태어난 우월한 것들을 모아 일족을 형성하기를 원한다. 일족. 일족이라니. 왜 가족이라고 부르지 않을까. 삼천 칠백 년 전 이집트 변두리에서 태어났을 적에는 그 역시 인간이었으면서 수천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그는 신의 힘을 빙자한 놀이를 하고 있는 듯 보인다. 초월적이고 위협적인 영생의 도로. 그의 육체는 매번 바뀐다. 인간을 바꾸지 않으면 그는 죽어버릴(사라질) 지도 모르는 일이다. 쓰고 있던 몸이 낡으면 주변에 있는 다른 몸으로 갈아타며 영생을 살았다. 등장은 흑인 남성이었지만 인디언 여성도 될 수 있고 백인 아이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아닌 짐승에게는 그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 그를 조상으로 둔 일원은 그가 힘을 쓰지 않아도 목소리를 듣는 것 만으로 바뀐 몸속에 들어있는 그의 존재를 알아차린다. 기묘한 일이다.


 손자들을 여기로 데려와. 나를   없지만 기억은  거야. 그들의 육체가  살점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사람의 육체가  조상을 얼마나  기억할  있는지 당신은 모르겠지.”


이야기의 극 후반부에 아냥우가 도로에게 건넨 말이다. 나는 이미 죽은 내 조상을 본 적이 없어 육체가 건네주는 기억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옥타비아 버틀러의 모든 책에서 노래하는 피내림은 흔히 말하는 우리의 '얼'과 비슷하다. 얼마 전에 막을 내린 도쿄 올림픽, 일본이라는 존재는 한국인에게 그 '얼'이라는 것의 상징적 원념체가 아닐까. 우리는 저들에게 지지 않는다. 일본과의 경기는 그 어떤 피부색에 파란 눈의 나라와도 다르다. 지지 않기를 넘어서, 이겨야 한다. 애국가가 흐르고 태극기가 일장기보다 높이 걸릴 때의 감동은 모든 한국인들의 심지를 끓어오르게 한다. 아냥우의 후손도 느끼고 있을까. 그녀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해 몇백 년 동안 고집스럽게 지켜온 무언가를. 형체와 감정까지 인간의 뿌리에서 한참 멀어진 도로를 마주할 때마다 느꼈던 혐오를.


이 책은 인류의 역사와 닮아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잉태하는 것은 여성이고 파정하는 것은 남성이다. 지금까지의 역사상 어떤 돌연변이도 이 가정을 뒤집어엎을 수 없었다. 삼백 년, 혹은 사백 년. 여성으로 태어난 아냥우는 일시적 안전을 신경 쓸 때를 제외하면 흑인 여성체의 몸으로 지낸다. 삼천 칠백 년 전 유색인종 남성으로 태어났던 도로는 여성보다 남성의 몸을 빼앗는 것을 선호한다. 내재된 성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지. 아냥우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도로는 그녀를 '여자'라고 부르고 아냥우 역시 그가 흑인 남성의 껍데기일 때 무의식적으로 안심한다. 까마득한 도로의 태초와 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둘은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그게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 둘 역시 같은 생물도 아니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설정에 따르면 지구 인구의 십이 분에 일은 그들이 만들어낸 후손 일지 모른다. 아냥우를 만나기 전부터 삼천 년 동안 쉼 없는 번식 실험을 해왔던 도로는 그녀를 찾아내고 나서도 아냥우의 몸을 빌어 퍼뜨린 종자가 종자를 낳고 그 종자의 종자가 종자를 낳았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인류가 굴러 굴러 흑인과 백인이 섞이는 것은. 인디언과 아시아 인이 합쳐지는 것은. 남성과 여성이 접붙게 되는 한 그럴 수밖에 없다.


치유와 변신, 노화하지 않는 아름다운 육체, 장수. 자애로운 인간성과 내면(몸과 마음을 모두 비롯한) 세계에 대한 탐구열. 아냥우는 돌연변이 중에서도 최상의 개체다. 와일드 시드(Wild Seed), 야생에서 나고 자란 씨앗. 그녀 역시 먼 옛날에 도로의 손길이 닿아서 만들어진 유전자다. 초반을 제외하고는 줄곧 여성의 몸을 유지하는 아냥우에게 나는 어리둥절함을 느꼈다. 남자로도 여자로도, 백인으로도 흑인으로도, 흑표범으로도 돌고래로도 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면서 왜 굳이 흑인 여성의 몸을 택하는 거지?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깨달았다. 두려울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녀는 강하고 영리해서 외피의 모양과 상관없이 가뿐하게 본인에게 가해지는 위협을 부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얼마나 완벽한가! 나 역시 강간의 위협과 가부장제의 억압이 없었더라면 주제를 모르는 남자보다는 지금처럼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몇 가지의 못 견디게 싫은 상황이 사라진다면 남성에게 따라붙는 다수의 권리를 포기하고서라도 다시 여성을 선택하는 것. 이것도 내가 가진 얼이라는 걸까. 여자의 얼일까, 여자의 한일까. 남자의 한은 어디에서 얼어 죽어 보이지도 않을까. 남자의 억울함엔 분노 말고 다른 건 없는 걸까.

하지만 남성으로 태어난 내 모습은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다.

지금의 나보다 더.


다소 뚜렷하게 나뉜 남녀의 특징은 역자 후기에서 명확해진다. 아냥우는 내면에서 원인을 찾는다. 스스로 독을 먹고 변신하고 뼈와 장기를 꿰어 맞추며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킨다. 외부의 그 누구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기 때문이다. 도로는 반대다. 그는 날 때부터 그런 재주가 있었다. 이유도 영문도 모른 채 그렇게 태어나서 남의 몸을 도난해 생존하는 방법밖에 알지 못한다. 도로는 탐구하지 않는다. 개선의 여지를 외부에서 찾는다. 광범위하게 착취하고 확률적으로 우성인자는 윤리 도덕과 상관없이 훗날 교배를 위해 남겨둔다. 목숨이 붙어서 정액만 뿌릴 수 있다면 그 외의 고려사항은 없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불임이거나 기형이 있는 종자는 태어날 때부터 제거한다. 자신에게 불손한 자식도 본보기로 처형한다. 도로는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가 없었다. 그는 퍼펫 인형처럼 껍데기 속에서 자신의 절대성을 우러러봐주는 군중을 바랄 뿐이다. 그 말 잘 듣는 군중이 속 썩이지 않고 오래 살아서 세대교체가 최대한 덜 일어나기를, 고분고분한 이들을 굽어살피는 기분을 제물처럼 쥐어주기를. 도로는 남성이다. 특권을 가진 그는 태어날 때부터 모두가 어화둥둥 기분을 맞춰주는 삶을 살았다. 경외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어느 쪽이든 도로에게 나쁜 쪽은 아니다. 그는 그렇게 살았다. 삼천 칠백 년 동안.


임신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늘 남편의 존재를 염두에 두는 아냥우가 불편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 소설의 특이한 시간축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가 시작하는 17세기의 아프리카에서 그녀는 이미 삼백 년을 홀로 살고 두어 번의 결혼을 했다. 그때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부족의 문화와 상관없이 첫 남편은 그녀를 사랑해 주었고 그런 시작은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한번 받아본 사랑에는 중독성이 있다. 나 역시 이 기분을 잘 안다. 단 맛이 나는 감정은 떼어내기 쉽지 않다. 그녀가 혼인과 임신, 출산, 양육, 자식의 치유를 지독하리만치 놓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게 속이 편치만은 않다. 하지만 아냥우를 비웃을 수 없는 것은, 그녀가 약하고 모성애 점철된 소설적 캐릭터라고 손가락질할 수 없는 것은

우리 모두 그녀와 닮은 여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머니를 닮았다.

나의 어머니, 당신의 어머니, 혹은 당신이 인상 깊게 보았던 누군가의 어머니를.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책 속에 보이는 그녀의 신념과 가치관을 비웃을 자격도 없다. 그녀는 도로 같은 것 보다야 마땅히 존경받고 모셔져야 할 제대로 된 인간이다.


비위를 맞추어주지 않으면 죽이거나 억지로 취해 복종시키는 도로에게서 아냥우는 도망치고 또 도망친다. 그리고 그녀는 남자의 신이 된다.

그녀의 가슴이 아직 오르락내리락 움직이고 있는 것. 도로는 여전히 헌 껍데기에서 새 껍데기로 옮겨 다니는 것. 꽤 괜찮은 결말이다. 아니, 어쩌면 호쾌한 결말일지도 모른다.


태양의 여자가 괴물을 이겼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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