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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Aug 29. 2021

백신을 맞은 이후 생리가 오지 않는다

괜히 신경 쓰이게.






그리고 그 시절에 관해 가장 분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무서울 정도로 부조화를 이루는 느낌인데, 이 느끼은 제기되지도 대답되지도 않은 그 모든 질문 때문에 더 욱 고조되었다. 그것은 마치 여자의 섹슈얼리티, 나의 섹슈얼리티는 어째선지 뒷전에 내팽개쳐진 채 논의되거나 탐사되지 않는 것 같은 느낌, 궁극적으로 남자들의 섹슈얼리티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이해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캐롤라인 냅, <욕구들> 중




*

내가 하는 일은 유동인구가 많은 서비스직이다. 하루라도 빨리 백신 접종을 모두 끝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일터에서도 일터 밖에서도 안전하다는 기분이 들지 않으니까. 나는 위험직군에 종사하고 있다.

12일에 1차 화이자 백신 접종을 하고 왔다. 얼떨결에 잔여백신 예약이 잡혀 맞고 온 것이었다. 백신을 맞기 전에 나는 궁금한 것이 많았다. 의사에게 물어볼 것도 많았다. 그리고 계획에도 없던 백신을 삼십 분 만에 맞았던 그날, 나는 간호사 앞에서 엄마 없는 아이처럼 주의사항에 고개만 끄덕이다 나왔다.


나는 경구 피임약을 복용한다. 벌써 몇 년째인지 세보지도 않았다. 생리를 하지 않는 날은 매일 경구 피임약을 먹는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이제 내성이 생겨 생리를 미루는 효과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하지만 약을 먹으면 생리 주기가 일정해지고 생리혈의 양이 현저하게 적다. 기간도 하루 이틀 내로 짧게 끝나서 복용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여자들의 생리는 다양하다. 한 달에 한번 규칙적으로 하는 사람도 있고 불규칙한 사람도 있고 생리양이 많은 사람, 적은 사람, 생리통이 심한 사람, 미미한 사람도 있다. 여자의 생김새만큼 포궁의 기능도 제각각이다. 여자들은 모두 다른 여성들이 각자 제 몸속에 든 장기와 주기적으로 힘겨루기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본인조차 모르게 몸안에서 구룩구룩 일어나는 일들은 여성을 민감하게 만든다. 심지어 생리는 잘한다고 해도 그렇게 얌전하지 않은 놈이다. 배꼽 아래서 질척거리는 기운이 느껴지고 감정은 조절할 여지도 없이 땅바닥에 처박힌다. 이런 증상과 반평생을 보내야 하는 데다가 이상이 생기면 불안감에 병원을 찾아다녀야 한다니. 그래서 나는 경구 피임약을 먹는다. 적은 생리혈과 한 달에 한번 예상 가능한 정확한 날짜, 혹시 약이 들어 처음 먹을 때처럼 이 개월이고 삼 개월이고 생리를 안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그리고 이 빌어먹을 현상을 내 몸에서 떼어낼 수 있을 때까지 떼어내 보기 위함이다.

경구 피임약을 복용하고 있지만 내 생리는 이달 20일 전후에 시작했어야 했다. 요 몇 년간 나는 매달 칼같이 그때쯤에 생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보다 먼저 백신을 맞은 여성 지인들은 생리 관련 부작용을 여럿 언급했다. 백신을 맞고 나서야 경구 피임약을 기억한 나는 급한 대로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자료가 부족했다. 공식 사이트에도 뉴스에도 제대로 된 기사는 없고 부작용을 겪은 사람들의 걱정 어린 후기만 가득했다. 발열, 근육통, 피로감. 화이자 백신의 부작용에 경구 피임약을 먹는 여성이나 생리통이 심한 여성의 증상은 기록되지 않았다. 사이트에 올라온 화이자 백신의 효과는 포궁이 없는 남성 신체만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이한 기분이다. 세상의 반이 여자인데, 모든 것은 당연하게 남성을 기준으로 측정되고 기입된다. 경구 피임약을 먹는 여성이나 생리통이 심한 여성의 증상은 기록되지 않는다.


백신을 맞고 이틀 뒤에 온 건강상태 확인 문자에 나는 미약한 근육통 빼고 적을 게 없었다. 내 생리 주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생리 예정일은 일주일이 넘게 남아 있었다. 백신을 접종한 지 16일이 지난 지금, 나는 계속 경구 피임약을 복용했고 생리는 시작하지 않고 있다. 경구 피임약을 먹는데 백신을 맞아도 되는 건지에 대한 사실도 모른다. 의사에게 물어보는 것을 깜박했는데 여기저기 찾아본 자료에도 나오는 게 없었으니까. 이 생리지연이 일시적 부작용으로 끝나기는 하는 건지라도 알았으면 좋겠다. 주변에는 우스갯소리로 이대로 영영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부작용으로 이렇게 혼자 속 썩는 신세가 된 것도 서글프다. 여자의 부작용은 논외로 처리되는구나. 만약 지금 건강상태 확인 문자를 보낼 수 있다면 나는 분명히 적을 것이다. 예정일이 8일 이상 지났으며, 경구 피임약 복용은 백신 접종 전에도 백신 접종 후에도 중지하지 않았다고. 왜 우리는 남성 신체의 곁다리로 취급되어야 할까. 이것은 전 세계의 연구 결과일 것이다. 누구도 여성의 몸에서, 생리현상에서 일어나는 부작용에 대해 수치화를 하고 경고문을 붙일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발열, 구토, 근육통보다 하찮은 여자의 생리. 역시 서글프다.


캐롤라인 냅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야기만 했지만, 나는 모든 것을 생각하고 있다. 여자의 호기심, 여자의 지성, 여자의 욕구, 여자의 욕망, 여자의 의지. 이 모든 것이 대부분 남성이 지닌 것에 비해 평가절하되고 무시당하고 있지 않느냐고. 백신 부작용에서 조차 이렇게 홀대를 받을 때면 어쩐지 여자가 궁극적으로 남자들보다 덜 중요한 인류로 태어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 생각이 들 때 ‘웃기고 자빠졌네.’하고 기지개를 켜야 한다. 생리 예정일에서 8일이 지난 더러운 기분을 모르면 평생 어른이 아니지. 내일쯤 생리가 시작되면 그 시커먼 피가 조금은 반가울 것 같기도 하다. 여자에게 이따위로 구는 세상에 여전히 종을 늘리고 사는 인류도 대단하구나. 가장 큰 화이자 백신의 부작용이다. 백신을 만든 곳도, 임상실험을 한 곳도 부작용을 게시한 공식 사이트도, 온 세상이 여성의 몸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는 짜증이 들게 만드는 것.

흥, 웃기고 자빠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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