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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Sep 01. 2021

빛이 사라지면 너에게 갈게

욘 A. 린드크비스트 단편집 <경계선> 감상

영화 렛미인(2008, 스웨덴)


​​


인간은 우리를 그들 모양으로 만들어. 우리는 우리를 인간들의 모양으로 만들지.

 A. 린드크비스트, <경계선>

​​​


*


원작이 번역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신청한 도서가 어제 도서관에 도착했다. 영화가 너무나 굉장했던지라 참을 수 없었다. 이틀 만에 완독 했고, 방금 마지막 장을 넘긴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뿌듯하다.

나에게  A. 린드크비스트는 독보적인 작가다. 그에 대한 사랑은 새하얗고 차가운 스웨덴 영화  편에서 시작된다. 아는 사람은  안다는 음울한 북유럽 감성의 뱀파이어 이야기, <렛미인>이다. 한참 미술을 공부하던 중학교  처음 보았는데, 수영장 씬은 무덤에서도 기억  법한 명장면이었다. 화면 너머로 전해지는 숨결도 얼어버릴 듯한 한기. 그때 깊은 인상을 받고 바로 원작을 찾아보았다. 교보문고 구석에서 책에 빠져들 것처럼 두꺼운 소설  권에 코를 박고 읽었던  기억난다. 영화만큼이나, 어쩌면 영화보다도 많은 차가움이 들어있는 벼리고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좋은 소설로 좋은 영화를 만들어냈다. 작가도 감독도 어린 배우들도 대단해 보였다. (후에 개봉한 할리우드 버전 <렛미인> 보지 않았다. 괜히 실망하게 될까 두려워서.)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우연히 영화 <경계선>을 보게 되었다. 영화를 보고 생각했다. 나라는 사람을 더 알고 싶다는 사람이 생기면 이 영화를 권해야겠다고. 이보다 더 내 가치관과 취향에 부합하는 영화는 너무나 드물다고. 어쩌면 이 영화밖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많은 영화를 보고 많은 감상을 남겼지만 이 영화만큼 누군가가 직접 관람해주기를 원한 작품은 없었다. <경계선>, 영화의 원작도 욘 A. 린드크비스트가 쓴 단편이었다는 것을 관람을 마친 후에 알았다. 이 작가는 무서운 것을, 동화 같은 것을, 섬뜩한 것을 쓴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당황스러우리만큼 매혹적이다.

영화 <경계선> 높낮이가 크지 않은 원작에 비해 영화적 각색이 훌륭하게 들어갔다.  책의 매력은 <경계선>에만 있는 게 아니라서  놀랍다. <렛미인> 읽을 당시는 워낙 장편의 소설이라 섬세하고 절제된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가  짧은 단편들을 보니 적은 분량에 놀라울 만큼의 긴장감을 조성해낸다. 분명히 공포스럽고, 아득한 이야기가 외부 세계를 어버릴 만큼 나를 집중하게 만든다. 몇 페이지 안에 영화 편이 통째로 들어간 기분이다. 어떻게 해야 이토록 건조하고 간결하게 사람을 사로잡을  있는지  수가 없다. 그가  이야기 한줄한줄을 정신없이 따라 내려가고 함께 무서워하고 파헤치고 경악하고 안도한다. 린드크비스트는 멋진 글을 쓰는 작가다. 그가 만드는 환상적이고 잔혹한 세상이 나를 매료시킨다.​


기울어지는 건물과 변기  고인  깊은 곳에 들어있는 무언가. 사람의 빈자리를 잔디보다도 가벼운, 플라스틱 같은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메우고 있던 임시 교사. <렛미인> 외전 격으로 쓰인 뱀파이어를 추척하던 경찰의 사랑이야기. 할리우드 액션 영화를 보는  같았던 좀비 연구소에 침입하려는 사나이. 이야기 하나하나가 놀라울 만큼 강렬하다. 긴장의 끈을 놓을  없는 진행이다. 이야기의 끝에서 그녀는  조금은 허무하고 아련한 엔딩을 만들어낸다. 방금 전까지 사냥꾼에게 쫓기는 토끼처럼 놀란 가슴을 순식간에 현실 세계로 끌어당기는 그런 종류의 허무. 부정적인 허무가 아닌, 안도와 아쉬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감정 말이다. 그가 쓰는 이야기는 무섭다. 무서운 것들이 신비로워서 자꾸 쳐다보게 되는 것이 무섭다. 그녀는 멋진 글을 쓴다.​


환상 문학이라는 장르에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작가다. 북유럽이라는 지역에서 나오는 살풍경한 배경도 그의 작품과 무서우리만큼 잘 어울린다. 입을 열면 입김이 색색 나오는 추운 나라. 하얀 눈이 꽁꽁 얼고 아이들이 고드름으로 칼싸움을 하는 나라. 하얗고 반듯한, 어딘가 텅 빈 공간을 연상시키는 레고 마을 같은 나라. 작가는 사람의 결핍과 심리 속에 깃드는 불안을 잡아낸다. 그 마음의 공터를 채워주려는 듯 공터의 존재를 각인시킨다.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언젠가는 행복해질 거라는 위안 안 되는 위로를 건네면서. 하지만 그 말은 맞는 말이다. 살아있다 보면 언젠가 한순간은 행복할 것이다. 뱀파이어의 종복이 되는 소년의 미래와, 의자를 누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은 남자에게도, 원치 않는 악의의 냄새를 맡으며 인간세상에 살아가는 이종족에게도 언젠가는 행복 비슷한 게 잠깐이든 영원이든 머무는 때가 있을 테니까.

버석한 세상에 환상적인 것들은 잠깐의 행복이 무색하도록 인간을 유혹한다. 그 틈이 보고 싶을 때 펼쳐보기 좋다. 기이하고 강렬한, 스산하고 오싹한 광경을 생생하도록 눈앞에 그려보고 싶을 때, 욘 A. 린드크비스트의 모든 작품을 추천한다. 강한 확신과 믿음으로, 읽는 이의 마음에 들기를 바라며.

다섯 편의 단편으로 뒤통수가 서늘해지는 가을밤이다. 내가 스웨덴이 아니라 한국에 있다는 것에 안심하며 눕는다. 북유럽의 괴물들은 바다를 건너올 수 없으니까.


그저 뒤통수가 조금 서늘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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