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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인 Sep 09. 2021

아빠가 찾아왔다

생일 전야


사랑할 수 있으면 사랑하는 거지, 뭐.

​​​


사람들은 끊임없이 미워한다. 그들은 미움 속에 살며 자신들의 상처를 계속 세고 있다. 그 상처를 치료하지 않으며 상처가 치료되도록 놔두지도 않는다. 따라서 그들의 삶 전체가 과거에 달려 있다.

현재 속에 살지 않는다면, 그대는 과거를 잊을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을 것이다. 나는 과거에 일어난 일을 모두 잊고 용서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현재 속에 살라고 말한다. 이것이 존재에 접근하는 가장 긍정적인 방법이다. 현재에 살라. 더 명상적이고, 더 자각하고, 더 깨어 있어라. 자각하고 깨어 있을 때만이 그대는 현재 속에 있기 때문이다.

오쇼 라즈니쉬, <더 북> 중


*


어젯밤 아빠가 왔다. 우리는 독일산 브랜디와 복분자, 캔맥주를 섞어마셨고 동생은 꼴딱 죽었다. 싱가포르에 갔다 와서 처음 보는 아빠다. 싱가포르에 가기 전에도 꽤 오랫동안 찾아가지 못했으니 못해도 8개월 만이다. 여전히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모습이다. 우리 아빠.

이른 생일 축하를 받고 케이크에 초를 꽂고 별것 아닌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아빠랑 같이 옛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배를 잡고 까르르 웃게 된다. 타고나길 말재간이 좋고 유쾌한 사람이다. 어쩔 수 없이 예쁜 눈과 보기 좋은 기럭지를 타고나서, 그중에 반은 나에게 반은 동생에게 물려준 아빠. 나는 아빠가 퍽 좋다.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큰 눈구멍과 우뚝한 코, 각진 얼굴은 할아버지와 아빠를 따라 나에게 왔다. 걸어 다니는 인감도장인 내 얼굴이 마음에 든다. 나는 길거리 누가 봐도 아빠 딸이다.

엄마는 가끔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듯이 묻는다.

넌 아빠를 왜 이렇게 좋아해? 어떻게 그러니?

나도 모른다. 그냥 아빠가 좋다. 누가 봐도 어여뻐할 만한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하필 내 아빠라서 어물쩡 말려들었나 보다. 맨 장판에 먼지가 나도록 맞았던 날들을 잊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걸로 언제까지고 미워할 수 있을 만큼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안다. 아빠는 지나치게 물렁하고 사람이 좋다. 지금 같은 세상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나를 때리지 않는다. 때리지 않은지 꽤 됐다. 그런 일들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하지 않지만 미안하게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제 나와 동생은 말을 너무 잘하는 인간으로 커버렸기 때문에. 아프고 화가 났었다고, 그때의 우리 집은 끔찍했다고 누구보다 생생하게 기억하기 때문에.

삶의 어느 순간에는 미친 듯이 지워버리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 나에게 그것은 대부분 인간이다. 첫 남자 친구, 변태 선생, 소아성애자 사장. 그것들을 아주 오래 미워했다.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지나간 에피소드에 조무래기 악당을 보는 것처럼. 그것들이 내 인생에 아예 나타나지 않았다면 좋았으리라고 짜증을 내던 때가 있었다. 화를 참지 못해 악을 쓰고 발을 구르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그저 생각할 뿐이다. 그래도 그들을 겪어서 다행이었다고. 그 사람들 역시 아빠처럼 오 년을 옆에서 구르고 부대끼면 그때보다야 예뻐 보일지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놈들도 나에게 처음 다가왔을 때는 찬란하고 고마운 때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사람들을 믿었고 그래서 되돌려 받았다. 믿음의 모양이 뒤바뀌는 경험. 그런 것들이 반복되고 반복돼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 출근길 지하철에 앉아있는 나는 과거의 악당들을 생각하며 아무 기분도 들지 않는다. 그저 날씨가 좋다는 생각뿐이다.

아마 내 인생에 가장 큰 악당을 꼽아야 한다면 분명 아빠일 것이다. 엄마도 있다.

어젯밤 발 냄새가 난다고 자다 말고 욕실에 앉아 샤워기를 트는 아빠를 보았다. 색색깔 케이크에 초를 붙이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 나와 동생을 아빠가 휴대폰 카메라로 열심히 찍었다. 아빠가 있어야 이런 순간이 만들어진다. 내가 살아가면서 제일 따뜻하다고 느끼는 순간들은 다 아빠가 있을 때였다. 나는 아빠를 사랑한다. 뭘 하든 내가 행복하면 되었다고 말하는 아빠가, 손주 얘기를 하다가도 너 하나 챙기는 게 제일이라는 아빠가, 이제 내가 어느 나라에 있는지도 헷갈리는 아빠가 좋다. 아빠는 어느 것도 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던 딱 한마디.


힘들면 언제든지 와.


아빠의 말은 주문이다. 이런 말을 변함없이 해주는 사람이 내 아빠라서 나는 겁 없고 무모해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아빠를 싫어했던 시간이 내 인생에서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살아가다 보니 괜찮아졌고, 괜찮은 것을 넘어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살아가는 것의 단맛을 이럴 때 느낀다. 모든 게 다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 때. 되돌아본 길이 그럭저럭 괜찮은 색깔의 팔레트일 때.

현재를 살다 보면 과거는 과거의 모습 그대로 지나간다. 수정할 여지도 없이 그대로 남아서 무뎌진다. 나는 아빠를 사랑하며 잘 살고 있다.

오쇼 라즈니쉬는 용서하라고 하지 않고 살아가라고 말한다. 미워하는 마음은 장례식에 꽃을 올려도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고 언젠가 어렴풋이 떠올리면 된다. 오늘 출근길은 날씨가 좋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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