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가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종묘공원은 말 그대로 거대한 바둑판이었다. 바닥엔 수많은 '바둑판'들이 '바둑판 배열'로 놓여있었고, 중원을 노리는 흑백의 바둑알마냥 할아버지들이 무리 지어 있었다. '딱 따다다 딱 딱' 바둑알 내려놓는 소리가 공원을 가득 채웠다. 그 한구석에서 휴대용 라디오를 듣는 그를 만났다. 쪽방에 산다던 그는 일흔이 넘었다. 과제를 하러 왔기에 뻔한 질문을 건넸고 돌아오는 그의 대답을 수첩에 받아 적었다. 식사는 보통 어떻게 해결하는지,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를. 젊은 사람이랑 이렇게 대화하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던 그는 어린애마냥 즐거워했다. 너무 목적성이 있는 질문만 하는 게 괜시리 미안해 첫사랑 이야기를 해달라 부탁했다. 그랬더니 조잘조잘 자신의 삶을 풀어내던 그가 갑자기 당황해 말을 돌리려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이 귀엽고도 재밌어서 끈질기게 졸라댔다. '젊은 청춘이랑 이야기하는데 첫사랑 이야기는 해줘야 하는 거 아녀요?' 내 회심의 한마디에 그는 마침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같은 동네 사는 처녀였지. 나는 아래뜸 살고 꽃분이는 웃뜸살았어. 뭐 웃뜸 아래뜸이라 해봤자 오백 메다나 떨어져 있을라나. 웃뜸 아래뜸 합쳐서 돌못이라는 동네여. 뭐 우리 집이야 논이 한 삼십 마지기 정도 있었으니께 그 와중엔 잘살었지. 그땐 그 정도면 엄청 잘 사는 거였어. 꽃분이네는 밭 몇 뙈기 있었지. 그 집 아저씨는 넘의 논 빌려서 농사짓고. 소작꾼이었어. 그땐 애들을 많이 낳었는데, 꽃분이는 외동이었어. 부모님이 몸이 안 좋았던 게 벼. 외동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참으로 고왔네. 피부도 새하얗고 몸도 자그마하고, 여튼 한품에 안으면 쏙 들어오겄다 싶었어.
-손은 잡었어요?
그땐 손잡으면 벼락 맞는 시절이었지. 근데 처녀 총각이있는디 뭐 그게 지켜지나. 손은 몰래몰래 잡었지. 장에 심부름 갈 때면 내가 괜시리 따라갔어 손 한번 잡고 걸어볼라고. 그 꼬불꼬불한 길이 손만 잡으면 천국이 따로 없드라. 손도 조막만 한 게 보드랍긴 억수로 보드랍고. 세상 구름 위를 걷는 게 그런 건가 싶드라니까. 풀밭에 앉어서 우리 꼭 혼인하자 했지.
-그럼 그분이랑 결혼했어요?
못했어. 할 수는 있었는디 내가 안 했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내가 미안허지.
-왜요?
꽃분이가 열여섯 되던 해 잡혀갔어. 그니까 요즘 시끄러운 그 위안부있잖어. 해가 쨍한 여름날에 옥수수 좀 따 가지고 갖다 줄라고 웃뜸 꽃분이네로 가는디, 매미가 죽어라 울어대드라고. 죽일 놈의 매미가 왜 저렇게 울어제끼나 했던 게 아직도 기억나. 그 집 앞에 갔는디 동네 어른들이 모여있네. 그 집 아저씨가 아줌마한테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다 때려 부수고 있어. 아줌마는 주저앉어서 통곡을 하고 있고. 부부싸움하는디 뭔 동네 구경을 하고 있나 했는디, 알고 보니까 아저씨가 잠깐 없는 사이 순사놈이 와서 꽃분이를 데리고 갔댜. 말로는 공장에 가서 일하는 거라고 하는디 뒤에는 총칼 든 놈이 우악스럽게 있고. 한참을 난동을 피우다 아저씨 아줌마가 부둥켜안고서 주저앉어서 울드라. 아저씨는 '니가 죽어서라도 그건 막었어야지' 하고 아줌마는 '내가 죽일년이오' 하고.
삼 년인가 있다가 해방되고 돌아왔는디, 그렇게 상했어도 여전히 곱드라고. 성격은 똑부라져 왔드라. 내가 알던 꽃분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런디 첨에는 꽃분이 돌아왔다고 동네 사람 다들 잘됐다 하더니만 한 달이나 지나니까 수근대드라고. 일본놈한테 몸 팔다 왔다고. 혀 깨물고 죽을 생각을 해야지 용케도 돌아왔다고. 아부지도 날 앉혀 놓고 다른 색시 찾으라는게 아니냐. 꽃분이는 안된다고. 거쳐간 왜놈이 한둘이냐고. 첨에는 나도 그런 소리하지 말라고 승질 부렸는데, 하 그게 사람이 참 간사하드라. 일하다가 생각나고, 잘라고 누우면 생각나고. 꽃분이가 짠하고 슬프다가도 그래 왜놈들 손탄건 사실이니께. 더럽다고 생각도 들드라고 솔직히. 한달이나 있다가 결국은 어디로 이사 가드라. 그 후론 생사도 몰라.
이사 가기 며칠 전에 날 불러내서 이야기하자고 하데. 자기 이사 간다고. 그래서 내가 혼인은 어렵겄다 했드만, 웃으면서 '그렇게 되었네요' 하고 가드라. 내가 그러면 안됐어. 사내가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