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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론 쥬스는 이천 원이다

그렇다면 난 이천 원어치의 사람이 되겠다.

by 김고양

저번 토요일은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고깃집에서 한바탕 고기를 먹고선 부른 배를 둥둥 두드리며 동네를 지나는데, 길 모퉁이에 말로만 듣던 쥬씨가 있었다. 가성비의 쥬씨! 요즘 핫한 쥬씨! 1L라고 구라 치다가 뽀록난 바로 그 쥬씨가!

하루하루 아재가 되어가는 게 서러워 요즘 핫하다는 건 뭐가 되었건 한번 먹어봐야 하는 게 요즘 나의 숙명이다. (아직 프로페쇼날 아재는 아니다. 아직은) 처음 가보는 쥬씨라 약간은 뻘쭘했지만 쫄 수는 없지. 똥꼬에 힘을 팍 주고 휘적휘적 팔자걸음으로 들어갔다. 물론 그 순간 눈은 바삐 움직여 이 가게의 메뉴와 가격체계를 파악하는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버벅대면 왠지 창피하니까-. 날카로운 시야와 명석한 두뇌는 이내 작은 사이즈 기준으로 1500원 혹은 2000원이라는 쥬씨의 가격체계를 파악했다. 그래 아직 쓸만해. 그렇다면 이젠 메뉴를 고를 차례다.

초코 바나나? 아냐 방금 고기 먹었는데 너무 헤비 해.

수박? 수박은 한입 베어 물때 흐르는 과즙이 제맛이지.

오파? 어감이 마음에 들지만 왠지 땡기지가 않아.

그래 결정했어! 오늘은 멜론이다! 조금 비싼 이천 원이지만 까짓 거 나는 소중하니까.


주문을 하고 나서의 기다리는 시간은 언제나 어색하다. 마치 소개팅녀를 기다리는 듯 시선을 마땅히 둘 곳도 없고, 딱딱한 표정으로 괜시리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는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496번 손님! 빨대 꽂아 드릴까요?


멜론쥬스라니 생전 처음 먹어보는 쥬스다. 물론 달콤하고 부드러운 멜론의 속살을 나는 사랑해 마지않지만, 이렇게 형체도 남김없이 갈아서 접하기는 처음이다. 왠지 멜론 쥬스에는 멜론 플레이어로 노래를 들어야 할 것만 같아 주머니를 뒤적여 이어폰을 꺼내 들었다. 물론 멜론 플레이어로 멜론 노래를 들으며 멜론 쥬스를 먹으면 완벽하겠지만, 아쉽게도 내가 아는 과일 노래는 가인의 apple 뿐이다. 그래 그거라도 듣자. 나중에 멜론 쥬스에게 사과하면 되지 뭐.


뻘짓거리 끝에 나는 멜론 쥬스를 한 모금 이빠이 빨았다. 두꺼운 빨대를 타고 쥬스가 내 입에 들어오는데, 달콤한 쥬스 끝에 멜론의 향긋함이 확 들이쳤다. 약간은 묽은 느낌이라 혹 누군가는 생과일 쥬스라고 하기엔 너무 묽은 게 아니냐고, 여기에 멜론이 몇 조각이나 들어갔겠냐고 항의할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보라. 욕심내서 과일을 갈아 마시면 맛은 진하겠지만 너무 걸쭉해서 마시기가 쉽지 않다. 엄마가 믹서기에 갈아준 죽인지 쥬스인지 모를 그것은 반은 마시고 반은 수저로 퍼먹어야 하지 않는가. 무릇 그렇게 욕심을 부리면 오히려 불편해지고 어쩌면 부담스러워 자주 찾지는 않게 될 공산이 큰 법이다.


그러니 지금이 적당하다. 약간은 묽은 듯이 하지만 달콤하게. 멜론 조각을 넣어 마지막엔 멜론 향이 흘러나오게. 첫 모금을 삼키고 나선 나는 겸언하게 다짐했다. 차라리 멜론 쥬스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네게 부담스럽지 않고 달콤하게. 쉽게 네가 받아들이지만 그 향기를 잃지 않게. 멜론 쥬스에 들어간 작은 멜론 조각처럼 내 진심을 빠뜨리지 않고 꼭 넣어서 그렇게 네게 전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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