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익은 바나나를 입에 물고서
바나나를 샀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수박이 한쪽 먹고 싶어 마트에 들렀지만, 사진 못했다. 수박 한통에 만원이 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나는 사지 못했다. 겨우 만칠천원이 없는 삶은 아니지만, 나는 바나나를 샀다.
그래, 먹고 싶은 건 참으면 그만이다.
더운 자취방에서 바나나를 하나 까 물었다. 슬프게도 내가 산 바나나는 아직 다 안 익은 모양이다. 단단한 육질에 밍밍한 향이라니. 이 더운 날 수박을 못 먹는 것도 짜증이 나는데 바나나 마저 다 익지 않다니- 조금은 서러워졌다.
바나나는 대표적인 후숙 과일이다. 밀폐된 공간에 초록의 바나나를 두고 에틸렌 기체로 채우면 바나나가 숙성되어 비로소 노란 바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산 바나나는 다시 말하자면 미성숙의 바나나인 것이다. 마치 나처럼.
에틸렌이 바나나를 성숙시킨다면, 나를 성숙게 하는건 너다. 천방지축으로 주위 사람들을 지치게 할 뿐이었던 내가, 어느새 심지가 굳어가 일 인분의 흉내를 낸다. 이기적이고 날이 서 있던 성격이 이제는 간혹 상대의 기분을 짐작해 본다. 이게 다 네가 내게 온 뒤의 일이다.
너는 어느새 내 주위에 가득 찼다. 세상은 zero sum이 분명할진대, 나를 성숙시키는 만큼 네 안이 공허해졌을까. 너는 너를 바쳐 나를 완성하는 중일까.